아주 작은 사내의 커다란 빈 자리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 사내가 죽었다. 아주 작은 키에 작게 웃을 줄 알았던 그가 폐암으로 죽었다. 그의 미소처럼 늘 향기롭게 타오르던 그의 담배연기가 그를 삼켜버렸다. 담배를 재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도 그의 출판사에 들르는 날이면 늘 내 몫보다 많은 담배를 축내고 나왔다. 북한산이 환하게 보이던 그의 사무실은 아주 작았지만 창만은 덩치에 비해 큰 편이었다. 마치 연극 전문 출판만을 고집하던 그 출판사의 매출이 보잘 것 없었고, 때문에 그의 생활은 참 궁핍한 것이었지만,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나 의지가 더할 수 없는 풍요였던 것처럼.

그가 죽었다. 잡지 일로 그와 내가 낯선 고장을 다니러 가던 열차 안, 점심 대신 세 병의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나누던 삶의 이야기들. 생활고로 아내와 3년쯤 헤어져야했던 이야기, 그 헤어졌던 시간의 아쉬움 때문에 밤마다 아내와 담배 한 대를 나누어 피우고, 침대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다며 행복해했던 그가 금요일 오전 10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의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던 작년 연말, 그의 아내가 만들어온 김치 만두의 포만감, 그 시린 새벽의 든든한 사랑을 두고 그가 갔다. 기름 값을 아낀다며 LPG차로 바꾼다며 좋아하던 그가, 올 여름 세검정 보신탕 집에서 참이슬을 나누어 마시자던 그가,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 담배를 권하고 교정을 보는 옆에 슬며시 캔맥주 하나쯤 놓아주던 그를 태운 것은 담배 연기만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는 혼자였다. 초여름의 햇빛을 사무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다놓고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의 출판사에는 사장이자 유일한 사원인 그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작게 웃으며 이 일 저 일을 상의했고, 그의 아내와 밤새 울고 웃으며 읽었다던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원고를 그가 출판하고 싶어했지만 그에게는 작은 책 하나 만들만큼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야구모자를 즐겨 쓰던 그가 만들어낸 책이 모두 몇 권이었는지, 그 책들의 수준은 어떠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판매되었는지 연극에 문외한인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했는지, 그 책을 향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 겨우 조금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위기라는 시대에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을 오로지 순수한 열정만 가지고 견뎌내는 일이란 결국엔 자신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일이라고 우울하게 깨닫는다. 그와 처음 만나 비워낸 참이슬과 흑맥주의 아리한 맛이 아직 입에서 쓰다. 그를 보내고, 나의 우울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다. 이제 그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안고 갔던 견고한 의지처럼 나도 다시 한번 마음을 갈무리해야겠다. 오늘은 문득, 창 넓은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녹여준 커피를 마시며 그의 향기로운 담배를 피우고 싶다.<행화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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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외로운, 그리고 적요한 신열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강의 소설은 읽히지 않고 스민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스미는 그녀의 언어는 가벼운 신열이다. 거센 통증은 아니어도 신열은 무엇보다 내가 나를 놓을 때까지 반복되는 집요함이 있다. 서서히 몸으로 스미지만 마침내 온몸을 달구어놓고 마는 그것의 저력을 그녀는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화려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소설들이 온갖 찬사의 중심에 있는 요즘, 그녀의 속울음 같은 이야기들은 담백한 속맛을 우려내기에 더욱 소중하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들의 고단함은 죽음과 관련된 거부할 수 없었던 정신적인 상처(trauma)에서 비롯된다. 이청준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정신적인 외상들이 현실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방어기제였음을 상기할 때, 한강의 그것은 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측면에서 변별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타인의 죽음을 체험했거나, 자신만 살아 있다는 죄의식으로 시달리거나,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아의식으로 단절되어 있거나, 이곳의 삶을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있거나,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 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집요한 응시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첫 작품이었던 여수의 사랑을 만나보면 이와 같은 특징들을 손쉽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복되는 까닭이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대항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근원적인 형질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죽음과 나의 의사 죽음 체험(여수의 사랑), 남동생의 죽음(질주), 배다른 형의 광기와 몰락하고 해체되는 가족(저녁빛), 병신 여동생의 실종과 황씨 딸아이의 죽음(진달래 능선) 등 얼핏 여느 고향동네에서 들었음직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한강의 이야기 속에서는 깊은 울림으로 살아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수의 사랑>에서 화자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 의해 동생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이 그 죽임으로부터 벗어난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나는 심한 결벽증에 빠진다. 혼자라는 심리적 고립감을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다는 인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혼자있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더럽고 나만 혼자 깨끗하기에 나의 홀로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씻는 행위는 나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이며 동시에 다른 이와 내가 다르다는 징표가 된다. 하지만 결벽이 심해질수록 상처는 덧날 뿐이다. 결벽은 세계와의 단절이며 회피이기에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자흔을 통해 한강은 그 상처가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고단함과 막막한 외로움,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

문제는 그러한 고단함과 외로움을 속병처럼 지닌 채 분주히 헛것을 쫓으며 사는 우리에게 있다. 하여 한강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헛것을 떨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튕겨나가 있다. 평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한강 소설의 고아의식이 그것이다. 가족은 나의 나됨을 형성시켜주는 곳이며 동시에 나의 나됨을 방해하는 곳이기도 하다. 앞의 것이 세계와 관계되는 나의 나됨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자기인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강이 천착하고 있는 삶의 근원성은 다분히 존재론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여수의 사랑이 상처의 속울음이었다면, 검은 사슴은 그것에 대한 치유의 모색이다. 치유는 상처를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극적인 응시에서 시작된다대낮 8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옷과 함께 기억을 놓고 알몸이 되어버린 의선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현재의 옷을 벗어버리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다분히 제의적이다. 경찰서를 탈출해서 인영의 방을 찾아오고 그녀를 보살펴주는 행위는 의선의 모습에서 인영이나 명윤 모두 그동안 숨기듯 지녀온 자신들의 상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지점에서 이청준의 <황홀한 실종>을 읽어보면, 2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작가가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있는지 비교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보살펴주던 의선이 돌연 행방을 감추고 그녀를 찾아 황곡에 이르고, 그 검고 고요한 어둠뿐이 그 낯선도시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의선을 찾는 행위는 결국 애써 잊어왔던 자신들의 어둠을 대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운명의 상처들로 가위눌린 채 지독스런 자기 유폐로 삶을 견뎌온 자들의 자기 조응. 의선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결국 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 어둠의 고통스런 직면.

이청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자주 사요하던 중층구조가 분절이 비교적 분명한 공간적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한강의 이와 같은 기법은 다분히 공시적인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 결을 감춘 한강만의 직조술은 핍진성에 대한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두드러지는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검은 사슴깊은 땅 속막장 동굴의 암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다는 이 가상의 동물은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이로 여기며 산다지하를 벗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마는 비극적인 운명의 짐승. 어둠 속에서 죽고마는 검은 사슴의 운명처럼 제 각각의 상처는 결국 앓고 있는 저마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의선, 인영, 명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고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명윤의 열병처럼, 인영의 기차사고로 인한 부상처럼 스스로 앓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 삶의 상처들이 존재의 근원의 그것이라면 그것의 치유 역시 자신말고는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의 중심에 검은 사슴의 치유가 놓인다.


최근 발간된 내 여자의 열매도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상처 속에서 앓고 있는 영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속울음을 울거나 옷을 벗고 대로를 횡단하는 광기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거칠게 단순화시킨다면, 검은 사슴에서 발견했던 치유의 시작이 그 상처와 맞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의 치유에 성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이제 한강의 치유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것은 그동안의 상처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존재론적인 상처가 차이로 드러나고 그것이 어긋남으로써 다시 상처가 된다는 영역까지 그의 상처와 치유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평생을 외롭게 산 사내는 번잡스럽고 화려한 지역의 아파트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고, ‘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단절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내 여자의 열매>. 몸의 멍으로 시작하여 끝내 푸른 식물로 변해버린 아내. 멍으로 수렴되는 아내의 외로움, 외롭기에 안정된 가정을 원하는 남편이 정작 자신의 집을 구리고 나서는 아내가 푸른 식물로 변해가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섬득한 단절, 다시는 자신의 힘으로 떠날 수 없는 식물이 되고나서야 아내를 돌아보는 남편의 어리석은 외로움.

이와 같은 어긋남은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어긋날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폐적인 자기 유폐에서 벗어난 인물상이라는 점과 그 어긋남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다시 자기 내부를 비움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의 성과 중에 하나다.

한강은 집요하게 흐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녀의 생물학적 연령이나 데뷔년도가 작품을 판단하는데 소용이 닿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집요함은 존재론적인 상처들을 계속 천착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도 새로운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또다른 방식으로 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부박하고 혼돈만 가중시키는 몇몇 소설과 대비되어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은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지 않는 즐거움은 결코 낙()에 이르지 못할 쾌()일 뿐이라고 소리없이 강변하고 있다.

󰡔BOOKPARK󰡕 200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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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기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볼 때 관객들은 그 이야기 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교적 느긋한 기분이 되어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은 흥미로운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구분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물은 관객들이 원하는 세계로 성공적으로 편입되며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로, 야수는 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세계로, 타잔은 인간적인 정의의 세계로 등등. 이 분명한 지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맹목이다. 맹목의 자세에는 반성이 없다.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지상의 삶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게 버려야될 공간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다에서의 삶이 지극히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버려야만 하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왕자가 사는 지상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인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할 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고한 동일성의 신화 속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근대적 사유의 양수이기 때문이다. ‘차이다름이 아니며, ‘타자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배제할 것인지 혹은 동화시킬 것인지 결정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결정의 한 가운데 근대적 주체가 있다.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은 그러한 근대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사유들의 공통된 정신을 살피고 있다. 그것을 저자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근대적 주체성은 표상(表象) 활동을 그 본성으로 한다고 했다. 표상은 세계를 주체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서로 차이를 지니는 다양한 것들을 틀어쥐고 동일성의 지평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며, 동시에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 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따라서 타자들은 오로지 표상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될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비표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프로이트, 라캉 등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미셸 투르니에, 쿤데라의 작품 등을 통해 비표상적 사유의 다양한 과점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와 범위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발을 무겁게 하는 각주의 나열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 레비나스, 칸트, 샤르트르, 프르스트 독법의 내공과 탄탄한 소화력에 기초한 것이다. 생경한 용어로 윽박지르듯 압도하지 않는 저자의 어법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다른 이들도 눈 여겨 보아야할 부분이다.

이 책의 중심에 있는 들뢰즈는 최근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들뢰즈의 사상이 지니는 주변 장르에 대한 유연함이 매력적인 유인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국내 수용에 있어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 그 용어의 문제였다. 그의 중심어인 아이주체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등의 용어들은 서양철학 전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명쾌한 정리는 여타의 들뢰즈 관련 독서에 있어서 견실한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소의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느긋한 자세의 독법이 필요한 책이다. 다른 들뢰즈 관련 책들을 볼 때 옆에 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을 대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에 최종판이 없듯이, 책읽기에도 끝이 없음을 되새기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대구대신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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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순결과 산문의 휘황함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훈은 깡마른 샤먼이다. 시리도록 파랗게 벼린 언어의 작두 위에서 그는 뛰어 오르고 올라간 거리만큼 내려서며 굿을 벌인다. 은유의 아름다움과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레토릭은 완과 급을 조절하며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문장의 단단한 뼈가되고 힘 있는 근육이 되어 신화 속의 사내들을 불러내곤 한다. 그러면 그의 글은 지금 이곳의 사내들이 잃고 있는 억센 완력과 뜨거운 생명력으로 난장이 되고 만다. 그 난장의 생명은 산문의 휘황함으로 빛나는데, 그 빛의 중심에 깡마른 샤먼 김훈이 있다.


산문이 살아 있는 시대는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산문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팽팽한 긴장으로 자신의 몫을 지켜가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가장 뼈아픈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산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성의 사유나 세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을 글에서 잃었다. 그러한 산문이 김훈의 글쓰기를 통하여 복원되고 있다.

김훈의 글쓰기는 특정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종과 횡으로 달린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미학적인 혜안이 빛나던 문학평론은 물론 두 개의 은륜 사이를 달리며 몸으로 써내려간 여행 산문과 현실에 대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을 촌철살인의 언설로 일구어낸 세설(世說) 그리고 남성서사의 예를 보여주는 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지난 겨울부터 필자의 책상에 두고 보는 것이 자전거 여행칼의 노래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이다. 세 권 모두 김훈 산문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특히 칼의 노래는 신열을 앓듯이 읽히는 작품이다.

김훈의칼의 노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즐길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훈의 산문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이광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박정희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탐색하고 있다. 이순신을 이용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은 지금도 정치권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중대 결심을 앞두고 현충사를 방문하거나, 서울의 핵심부인 세종로를 압도하고 있는 이순신의 동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신화화가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 결과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는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의 노래는 탁월하다. 백의종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왕과 권력층의 견제에 의한 억울한 옥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장으로 향해야하는 아들의 슬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거대한 적의 수군과 맞서야하는 절망감, 부하들을 먹이지 못하는 지휘관의 무력감, 온 천지에 널린 주검과 굶주림과 적의 칼날 사이에서 대면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이순신을 작가는 복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시적이면서도 단호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읽는 이를 굶주림과 피비린내가 주검으로 넘실대는 남해의 전장을 끌고 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의 노래의 또 다른 미덕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토록 끔직하고 섬뜩한 현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산문 곳곳에서 보이던 향기롭고 찬란한 통찰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을 얻고, 이순신의 사적(史籍)으로 뼈대를 세워 살아난 것이 바로 칼의 노래인 것이다.

칼의 노래로 이순신은 자유로워졌다. 독재자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속의 인물로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의 산문정신을 통해서였다. 오늘 우린 칼의 노래에서 단순하고 순결했던 한 무장의 칼과 단호하고 꼿꼿한 한 산문가의 고뇌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창원대신문>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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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輪의 길, 산문의

김훈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람이 앞서지 못하는 바퀴와 사람을 앞설 수 없는 바퀴 사이에서 마른 바람을 맞으며 사내가 달린다. 사내는 자신의 자전거를 풍륜(風輪)이라고 부른다. 사내의 풍륜은 세상의 길을 온몸으로 감으며 오르고 감은 길만큼 풀어주며 내려온다. 산이 불러 산까지 데리고 간 길을 내려놓고 어둠을 싣고 데려오고, 어둠을 싣고 가는 날에는 전조등 밝혀 길을 데리고 내려오는 그의 풍륜은 때때로 바다까지 흘러가서 넓고 붉게 물든 노을과 길고 검게 느린 그림자 사이에 서 있곤 한다. 그곳에서 사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기는서해의 관능이나 날카롭고 명징하고 눈부시게일출을 향해 달리는 동해에 이르는 강들의 고단함을 본다. ‘소금이 오는 옥구 염전에서 사내는 짜고 향기로운 소금을 보고, 제 몸을 태워 날아가는 만경강 하구의 도요새에게서 필멸(必滅)의 장엄함을 본다.


사내의 풍륜은 본다’. 흐르면서 본다. 산을 보고 들을 보고 바다와 강을 보며 하늘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척박한 풍요를 수납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의 시간들을 본다. 사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들으면 말하게 되고 말하면 논()하게 되는 까닭이다. 논하면 시비에 매이고 시비에 매이면 떠난 길이 단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밖을 봄으로써 안을 비추고, 안을 비춤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어지는 이치를 사내의 풍륜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사내의 풍륜은 뒤차를 인도하기 위해 후미 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아니며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전조등을 켜는 것도 아니다. 사내의 코앞을 동그랗게 비추어 선도(先導)해주는 전조등이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라면, 빨갛게 불든 후미 등은 지나온 길의 증거다. 그래서 어둠이 내린 길에서 사내의 풍륜은 의지증거사이를 달린다. 하여 사내의 풍륜이 보는 것은 의지와 증거 사이에 머문다.

달리던 바람이 멎고 풍륜이 자는 밤이면 사내는 원고지에 꾹꾹 눌러 손으로 글을 빚는다. 사내는 풍륜 아래서 풍륜 위의 일들을 기록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사내의 글에서 풍륜이 본 것과 사내가 본 것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 거북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나아가는 여수 돌산 향일암에서 서울의 여의도까지 서른 곳이다. 풍륜이 보고 달려온 것들은 사내의 레토릭을 넘지 못하고 사내의 레토릭은 풍륜을 앞서 달리지 않는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 들이나 바다, 그 어느 곳 생의 시간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사연이 길을 만들고 길은 내력을 들려주는데, 그곳은 듣는 이가 없어 적막하다. 적막이 만드는 깊이 마다 시간이 고이고 고인 시간에는 사내가 데려간 속기(俗氣)가 부끄럽게 낯을 씻는다. 씻은 낯을 바람에 말리며 사내의 풍륜은 먼지 낀 세상으로 내려오고, 내려온 거리만큼 다시 안개 낀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사내의 병은 불치(不治).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은 경이롭다. 우선 상업자본에 의해 공공연하게 압도되어 있는 중요 일간지에서 이와 같은 미학적이고 그래서 별로 쓸모가 없는(?) 글을 서른 회나 연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 필자를 경악케 하는 것은 8개월 만에 이 책이 10쇄를 찍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해리포터처럼 환타지의 몰입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교양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김훈은 조앤 K 롤링이거나 유홍준이 아니다. 물론 그는 김진명이거나 신경숙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중적인 흡입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 있는 시퍼렇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 같은 문장과 삶의 한복판을 꿰뚫는 것 같은 섬뜩한 레토릭에서 그 까닭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나 수사의 힘만으로 이 낯선 책의 흡입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고, 최근 큼직큼직한 양서와 베스트셀러를 외줄을 타 듯 잘 내고 있는 출판사 마케팅의 힘이라기에도 무엇인가 모자란다. 어쩌면 자전거 여행의 성공은 산문의 힘, 그 근력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의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산문이 살아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소설이 산문 영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다. 소설은 산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자명한가? 소설의 가공할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또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 산문 영역에서 소설의 압도는 다른 형태의 산문들, 즉 곡진한 생활 글이라든가, 날 선 감각의 기행문이라든가, 읽는 이에게 온 마음을 전하는 편지글이라든가, 미더운 주장의 논설이라든가 그 종류는 굳이 한문학의 수다한 종류의 그것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다양한 산문들이 살아야 글이 제 몫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 삶의 비의(秘意)를 캐려는 부단한 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 즉 소위 산문정신의 구현을 소설로 국한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협하다. 이러한 편협함은 글을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러한 글을 읽는 행위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지적 허영이나 호사스런 기호(嗜好)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다. 산문이 읽히지 않는데 그보다 행간이 넓은 시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글의 호위를 받지 못하고 걷는 삶의 길들은 얼마나 무모하고 불운한 것이냐?

다시 자전거 기행으로 돌아오자. 이 책이 지닌 몇 가지 중요한 의의는 남성적 글쓰기의 복원, 산문의 현대적 형태 모색, 레토릭을 통한 미적체험의 가능성을 증거하고, 무엇보다 그러한 다양한 시도가 대중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2001년 동인문학상 작품인 칼의 노래에서도 잘 나타난 바와 같이 김훈 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어법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덕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의 시작에서부터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며,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라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왜 길이 도()가 될 수밖에 없는지 시나브로 드러내고 있다. 길은 인간의 것이기에 마을을 떠나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식은 결국 그가 그 길을 끝없이 달려야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는 실존적 차원의 인식과 의지이며,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는 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길에 대한 신뢰는 유한한 삶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대가 적막한 산야와 처연한 풍광사이로 그의 풍륜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풍륜이 간다. 이 천박하고 척박한 시대에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아직은 안개 낀 들과 강과 바다를 달린다. 은빛 바퀴에서는 그의 수사(修辭)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빛나고, 그 빛은 차가운 금속의 그것이 아니라 풍륜이 보고 달리고 있는 산야와 바다의 것이다. 그래서 풍륜의 바퀴는 반사하지 않고 삼투한다. 금속의 삼투, 삼투의 절묘한 균형, 그 중심에 이 책이 놓인다. 원고지 칸칸이 그가 덖고 있는 글에서 피어나는 향은 물 없이도 그 쌉쌀한 맛을 우려낼 것만 같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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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봄이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올 봄은 참 더디게 온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릴 정도니 달력도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성급한 꽃잎은 벌써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번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도 둘째도 중간고사란다. 첫째는 학원 보강으로 늦은 시간 학원이란다. 연구실에서 들어가면서 데리러 갔더니 아직 수업중이라고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 백화점이 있고 주변에 상가와 의심스러운 술집들이 밀집된 지역에 아이의 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부모들이 차 안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11시가 다 되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아직 중학교 2학년인 아이의 핼쑥한 볼이 안쓰러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복잡했던 것은 늦은 시간 학원 앞 도로만이 아니었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자와 아이에게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삶의 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봄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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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배려의 아름다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무상급식 문제로 정치권이 뜨겁다. 전면적 무상급식이냐 선별적 무상급식이냐를 놓고 지방선거와 연계하여 정치권은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해할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설득과정이 아니라 쌍방 모두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선동이라는 의구를 떨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자는 무엇이 옳다고 판단하거나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솔직하지 못한 논란 속에서 말은 못하지만 심하게 상처받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염려는 떨치기 어렵다.

1970년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때에는 학기초면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을 학생들 신청을 받곤 하였다. 교과서 대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는데 선뜻 손을 드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그 수요를 조사하면서 모두들 눈을 감으라고 하시던 장면이다. 손을 드는 아이가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 조심하시던 선생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은 아마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선배에게 어떻게 아이를 낳아 기르며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었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별다른 직업 없이 공부를 하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던 시절, 그 길을 몇 년 먼저 간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 선배는 날마다가 기적이었다고 씁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었다. 박사를 마칠 무렵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하루하루가 참 벅찼던 시절, 어느 날인가 은사님께서 차를 가지고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은사님은 당신을 어느 곳까지 태워다달라고 하셨다. 평소 제자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 의아한 일이었다. 그런데 은사님은 가시다말고 대형마트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가트를 두 개 끌고 오라고 하시고는 분유와 기저귀를 두 가트에 가득 담아주셨다. 넉넉하지는 않았도 아이의 분유와 기저귀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물이 핑 돌정도로 감사로 벅차오르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힘겨운 시간을 위로해주시기 위해 일부러 부르시고서는, 제자가 부담을 느낄까봐 당신을 어딘가로 태워다달라고 말씀하시던 은사님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은퇴하시고 나서도 그 해에 가장 연구업적이 뛰어나 제자에게 적지 않은 돈과 족자를 내리시고는 송구스러워할 제자에게 글을 주었으니 글값으로 과일을 사오라고 하시던 선생님. 당신이 200만원을 상금으로 내리시고 그깟 과일값이 없어서 그리 하셨겠는가?

일본에서는 유치원비를 담당 관청으로 내게 한다고 한다. 저소득층의 유치원비를 나라에서 지급하는데, 유치원에서 유치원비를 직접 거두면 누가 저소득층인지 알게 될 터이고, 그것이 혹시라도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금융 위기 이후로 좀처럼 경제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무상급식이 문제 인 것은 무상급식의 대상이 될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배려를 누가 뭐라겠는가? 다만, 그 배려의 과정이 좀 더 은근하고 조심스럽기를 바랄 뿐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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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고 대견한 탈퇴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원더걸스의 선미가 탈퇴를 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공식발표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텔미노바디로 국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고 미국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원더걸스에서 굳이 탈퇴를 선언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보아의 아이돌 한류 이후 전방위적인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최근의 가요계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물론 브라운아이드걸스, 포미닛, 2NE1, 애프터스쿨, 카라, 티아라,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SS501, 샤이니, 2AM, 2PM, FT 아일랜드 등 새로운 콘셉트와 아이템으로 매혹하는 아이돌의 등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물론 조기에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여 스타로 육성하겠다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향유 주체와 비슷한 연령의 아이돌을 통하여 스타와의 동일시를 강화하고 몰입과 소통을 극대화하겠다는 매우 유효한 전략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근 아이돌은 단지 젊은 층의 지지뿐만 아니라 아저씨 부대와 아줌마 부대의 열광을 이끌고 있다. 로리타 신드롬과 상관하여 음란한 판타지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만큼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획의 성과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데 있다. 사회적, 문화적 체험이 부족하고 정신적으로 미성숙 상태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며 무차별적인 대중의 열광과 비난을 감내해야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얼마 전 2AM의 조권은 자신처럼 긴 연습생 시절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단지 연습 기간이 길었다는 하소연이 아니라 연습기간 내내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청소년기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다. 또래들과 함께 즐기며 체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 기간으로 보내야 하고, 데뷔 이후에는 그동안의 투자를 보상받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하기 때문에 다시 또래들의 체험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을 거듭해야만 한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나 활동이 아니라 기획사의 콘셉트에 따라 만들어진 캐릭터와 아이템으로 활동해야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와 환호가 높을수록 그들의 우울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돌은 이 시대의 극단화된 욕망이다. 향유자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을 아이돌에게 투사함으로써 일체감을 느끼고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기교육, 노예계약, 또래로부터 유리된 생활, 몸짱 등 아이돌과 관련된 코드들은 모두 우리시대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미의 탈퇴는 반갑고 대견하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 지금 이곳의 우리가 갖지 못한 고민과 결단의 모습을 선미에게서 보아서 일까? 난 선미의 탈퇴가 반갑고 대견하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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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의지인 까닭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봄은 개강과 함께 오지 않는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개강과 함께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겨울이 끝난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캠퍼스 곳곳에 따듯한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지고 벚꽃이 쌀 튀밥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도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계획하고 실천한다는 의미다. 당신 스스로 변화의 기운을 가슴에 담을 때, 기운이 의지가 될 때, 의지가 실천에 이를 때, 그 실천이 당신을 좀 더 따듯하게 할 수 있을 때, 문득 봄이 오는 것이다.

엄동의 혹한을 뚫고 찾아온 이 계절에 당신은 어떤 변화를 계획하고 있는가?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공모전을 준비하고 어학점수를 올리는 것도 좋은 계획임에 틀림이 없지만, 남들이 모두 채워가는 이력서의 스펙 한 줄 한 줄이 정말 최선의 변화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준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남다를 것도 없고 후킹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스펙은 당신의 취업은 물론 당신의 삶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갖추고 있고 모두가 생각한 것이라면, 굳이 당신까지 그것을 갖추고 그렇게 생각해야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 계절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은 무엇이냐고, 당신은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영어회화에 능통하고 토익 고득점을 얻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학연수 간 낯선 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외국인은 안 된다는 현지인 스텝과 부족한 영어로 토론을 벌여 마침내 참여한 도전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에리카캠퍼스 사회체험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문화콘텐츠학과 박예은 학생의 사례) 이 도전이 매력적인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그 어떤 난관도 뚫어내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는 점, 부족한 것은 의지와 열정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도전이 매력적이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먼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끄고,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의 맨 끝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때 당신은 어떤 삶을 어떻게 꾸려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는가? 기억의 맨 끝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새내기로 입학하던 첫날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정말 하고 싶고’,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일은 무엇이었나? ‘하고 싶고’, ‘해야만 할 일을 위해서 당신은 할 수 있는능력을 키우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해왔고,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조금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물음의 답을 혼자서만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다음에 주변에서 답을 구하자. 당신 주위에는 부모님, 선배, 친구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같은 학생들을 매년 만나는 교수님들이 계시지 않는가? 연구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제 곧 교정 가득 백합과 벚꽃이 흐드러질 것이다. 그 사이사이 새내기들은 풋풋한 패기로 뛰어다니고, 복학생들은 다소 어색한 미소로 강의실에 들어설 것이다. 그래서 봄이다. 봄은 생명이고, 생명은 변화다. 변화는 의지와 실천을 수반해야만 한다. 다만, 지금은 의지와 실천에 앞서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간이다. 이 봄 당신이 꿈꾸고 있는 봄은 무엇인가?

<한대신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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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콘텐츠의 보고, 그래픽노블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0674억 달러에 픽사를 합병한 디즈니는 2009년 마블 코믹스를 40억 달러에 인수한다. 전자가 새로움에 대한 투자라면 후자는 익숙함에 대한 기대다.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움과 익숙함의 이율배반적인 요구, 특히 익숙함에 대한 요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익숙한 원작을 활용해 새로움을 구현한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함으로써 마블은 원천콘텐츠의 화수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영화 판권을 판 대표적인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마블 코믹스가 디즈니에 넘겨줄 수 있는 캐릭터는 5000여개에 달했다. 스토리에서 강점을 보이는 DC코믹스에 비해 캐릭터에서 압도적인 마블코믹스의 5000여개 캐릭터는 곧 그 이상의 영화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워너브라더스에 편입된 DC코믹스나 디즈니에 인수된 마블 코믹스는 미국 만화 시장을 이끌어온 두 축이다. 워너브라더스와 디즈니는 거금을 들여 왜 이들을 사들여야했을까? 대표적인 3H 산업(High-cost, High-risk, High-return)인 영화에서 전환(adaptation)이나 프랜차이즈 필름(franchise film)화는 대표적인 리스크 헷지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환과 프랜차이즈 필름의 출발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향후 지속적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콘텐츠의 확보인데,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는 이미 수천종의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회사가 가지고 있는 원천콘텐츠가 바로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다.

그래픽노블은 1930년대 이후 이슈(issue)단위로 연속되는 슈퍼히어로 중심의 연재물 포맷의 코믹북을 주제의 심화와 내러티브의 완결로 차별화하면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은 코믹북과의 대타적(對他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픽노블은 독립된 작품으로서 차별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1)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 구조와 완결성을 전제로 2) 유니크한 작화를 바탕으로 작가주의적 아우라 확보하고 3) 보다 성숙하고 다양한 독자를 대상으로 4) 사회적 문제는 물론 개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통하여 보편적 공감과 테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구현한다.


이와 같은 그래픽노블의 특성은 독립된 장르로서 충분한 의미를 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거점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된다. 무엇보다 작품 단위의 밀도와 완성도를 확보한 내러티브차별화된 영상 연출이 가능한 유니크한 작화는 거점콘텐츠로 전환하기 용이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콘텐츠로서 향유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다. 이 말은 초기 코믹스처럼 가루비누 같은 세제나 껌을 팔기위한 프로모션 툴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 있는 문화행위로서 그래픽노블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는 잉여의 행위다. 잉여의 행위기 때문에 창작/향유의 과정에서 반드시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만화 같은만화니까라는 이중적인 레토릭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는 B급문화로서 저급한 문화행위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편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만화 같은이 주는 상상력과 표현 그리고 발언의 자유로움을 극대화하면서 현실과 부딪칠 수 있는 요소들은 만화니까로 견제함으로써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차별적인 우위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화에 예술성과 진지한 깊이를 더한 것이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현재와 절망한 역사를 흑백의 절묘한 미학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정지의 역설을 보여준 프랭크 밀러의 <300>이나 <씬시티>나 미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아이콘 무정부주의자 V를 그려낸 앨런 무어의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는 서구의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들이다. 신화적 분석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풍요로운 텍스트인 뫼비우스의 <잉칼>, 신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정치풍자가 유니크하게 어우러진 앵키 빌랄의 <니코폴>, 중년의 위기와 진정한 자아 찾기를 그린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 만화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부침하는 인간을 리얼리즘 문학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동성애와 성장담을 교직시킨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불행한 소년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성장통을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 등은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을 제외한 대표적인 그래픽노블이다. 우리 작가들로는 동심의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질곡을 그려낸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울기엔 좀 애매한>,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년>, 웹툰이라는 매체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픽노블의 특성을 여실히 구현하고 있는 윤태호의 <이끼>, <미생>,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발광하는 현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그래픽노블은 대부분 사회의 문제나 개인의 성장에 중심을 두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를 지향하는 리터러리(Literary)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이다. 킬링타임용 싸구려 B급문화의 탐닉이 아니라 만화라는 즐거운 장르를 통해 가치 있는 문화체험을 하고자 하는 욕구와 영화, 드라마와 같은 거점콘텐츠로 주목받은 원천콘텐츠를 즐김으로써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Transmedia Storytelling)을 향유하려는 적극적인 욕구가 그래픽노블을 통해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 만화는 그래픽노블이나 웹툰을 통하여 만화 너머를 말하거나 만화를 넘어서려는다양한 시도로 충만하다. 문화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보다는 그것을 왜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픽노블이 지닌 소구요소와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문화적 욕구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경로 등에 더 눈길이 가야 하는 이유다.

 

제일기획 사보 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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