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와 염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는 향수를 좋아합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보니 늘 아침이 분주한 제게 스킨을 바르고 타이 뒤나 손목에 가볍게 향수를 뿌리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차 안에서 아침에 뿌린 향을 느끼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씩 향이 좋다고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면 내심 반가워합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거리에서 좋은 향을 맡으면 누구든 따라가서 그 향과 향수의 이름을 묻곤 했으니 약간 병적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버버리 여름용 여자향수의 달큰함과 샤넬 넘버5의 강렬한 유혹 그리고 아라미스의 상큼한 아침도 그 무렵 제가 좋아하던 녀석들이죠. 아내는 간혹 제가 욕실에서 뿌린 향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요즘 강의실에서 이채로운 것은 남학생의 염색과 귀걸이입니다. 남학생의 1/3정도가 귀걸이를 했고, 3/4정도는 염색을 했으니 이제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요.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핑콜퍼머 정도가 가장 멋을 부린다고 부리던 것이고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하고 온 녀석들은 교수님께 한 소리 듣거나 동료들의 놀림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사실 귀걸이를 멋스럽게 하고 고은 색의 염색은 제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도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젠가는 하얀색 브릿지와 귀걸이를 해보겠노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긴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브릿지에 돈 들릴 일을 없을 것 같고, 사회적 지탄이 없다하더라도 겁이 많은 제가 귀를 어떻게 뚫겠습니까.

1학년 교양 강의에서 강조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자기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염색이면 염색을 해봐라. 귀걸이라면 귀걸이를 해라. 담배가 된다면 피워봐라. ,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멋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새내기들의 염색은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습니다. 단체할인을 받으며 한꺼번에 했는지 모두 비슷비슷한 색깔에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흡사한 헤어스타일을 멋스럽게 보기는 좀 어렵죠. 3-4년 전에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스트레이트 퍼머를 해서 앞가르마를 타던 HOT머리를 했고, 1-2년 전에는 배용준의 바람머리가 또 강의실에 넘쳐나곤 했습니다. 자기 얼굴과 상관없이 로봇처럼 똑같은 헤어스타일의 학생들을 강의시간마다 보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불을 질렀던 말콤엑스가 아니더라도, 우린 모두 지금의 자신보다 멋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염색일 수도 있고, 귀걸이를 비롯한 피어싱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처럼 향수가 될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이 19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우린 아직도 누드 훔쳐보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몸을 매개로 자신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보다 멋지게 되기 위한 전제가 지금의 나, 자연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거리입니다.

멋지다는 것을 멋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 멋진 것입니다.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멋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는 제 코가 낮다고 시간 날 때마다 코를 세우듯이 들어오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또 제 끊어진 눈썹은 어머니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시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보면 눈두덩이가 부은 모습이 꼭 12라운드 권투 경기를 마친 것 같아 보여 스스로 ‘12라운드라고 부르며 자조하곤 합니다. 그나마 어디 한군데 번듯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상 나쁘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코가 저만 낮지 않고, 눈썹이 저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침에 눈이 붓는 것도 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 아이의 약간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납하는 그 일이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자기긍정을 낳고, 자기긍정은 즐거움을 낳는다는 사실을 오늘도 배웁니다.

멋스러운 사람은 끊임없이 멋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것이 남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과 마음에 모두 익어서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멋이 몸에 익은 사람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향수를 가지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그 은은함과 염색약으로서는 낼 수 없는 멋스러운 그 색깔을 치과에서 보철을 하면서도 핑크색으로 해달라던 첫째와 요즘 부쩍 치마를 입겠다고 유치원갈 때마다 우기는 둘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겝니다. “멋은 노력이라고.

2004년 《오픈아이》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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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과 토우슈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80년대에는 디스코텍을 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놓고 즐기기 힘들었던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사실이 떳떳할 수는 없는 일이다보니, 그러한 겸연쩍음을 닭장이라는 비어로서 상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닭장이라는 말에는 다소의 경멸내지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비극은 이렇게 스스로 닭장이라고 비하하며 그 곳에 가고 싶어 했고, 더 큰 비극은 춤추는 그곳에서 춤추는 일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닭장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 속칭 죽돌이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화려한 조명과 음악소리에 압도되어 춤을 제대로 출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춤을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닭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명이 원을 만들고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표면적으로야 그 집단의 소속감과 우의를 다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속내를 들춰보면 잘 추지 못하는 춤을 집단의 힘으로 커버하려는 시도했습니다. 옆에서 밀어 넣으면 못이기는 척하고 원의 중앙에 나가서 춤을 추면, 평소 마음에 있던 남학생이 파트너를 자청하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자신들의 춤이랄 것도 없는 몸짓을 보여주면, 원을 이룬 친구들은 세상에 그보다 나은 춤은 없다는 듯이 환호성을 질러줌으로 해서 서로 어설픔과 무안함을 넘어서곤 했죠.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압제로 인하여 하고 싶던 것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애마부인이 이유 없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던 그 시절, 기본만 내고 들어가면 물 쇼, 불 쇼, 어우동 쇼까지 감상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원을 이루고 군무(群舞)를 추던 20대의 모습들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중의적인 슬픈 풍경이었습니다.

요즘 춤이 열풍이랍니다. 학교에서도 축제 전후가 되면 등장하는 댄스 동아리의 역동적인 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태권도와 권투를 에어로빅과 결합시킨 태보(Tae-Bo)에서부터 매력적인 자극인 살사댄스 그리고 사교댄스에 이르기까지 댄스의 열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열풍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연령을 뛰어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예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춤은 음지의 문화였죠. 가무악(歌舞樂)이 하나였던 원시종합예술형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본시 춤은 광장의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추는 춤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더불어 함께했던 이것인 음지로 들어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먼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기에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의 춤문화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양공주 문화와 기지촌 문화와 결합하면서 밀실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60-70년대에 효율성만을 중심으로 한 성과주의로 인해 일과 여가의 기형적인 불균형 구조를 낳았고, 그 결과 술집여자와 나누는 춤, 바람난 여자의 징후 등으로 집중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신문에 심심하면 등장하던 카바레에서 잡혀온 아줌마들 사진과 접대문화 운운하며 등장하던 술집여자와 춤추는 중년들의 하반신 사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저는 문예극장 대극장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 춤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deformation)을 꾀하는 젊은이들의 숨소리에서서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Shall we dance>가 아니더라도 중년부부가 음악에 맞추어 완급을 조절하며 스텝을 맞추는 모습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그것은 단지 일이 곧 삶이 아니라 일은 삶을 더불어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여유로운 사고, 부부가 함께 하고픈 것을 만들고 실천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제게 몹시 절실하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런 눈으로 보면 몇 년째 브라운관을 압도하는 댄스그룹의 격렬한 춤사위도 생명의 몸짓으로 넉넉하게 볼 수 있습니다. 때론 몸은 따르지 않아도 따라하는(유승준의 가위춤까지는 각이 나왔는데) 제 모습을 보며 웃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도 춤이 주는 또 다른 혜택이라면 지나칠까요?

둘째가 식탁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종아리를 모아 세웠다 풀었다 합니다. 이웃집 아이가 입었다는 발레복이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보아주어도 통통한 녀석의 허벅지며 종아리를 보며 녀석의 과욕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춤이 자발적인 생명의 파동이었듯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 녀석이 발레복이 입고 싶다면 사주겠지만(제 언니 것이 있죠) 토유슈즈를 신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할 때 격렬하고 때론 우아한 자신만의 춤을 보일 수 있는 40대를 저는 꿈꿉니다.

2004년 《오픈아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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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천년여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늘 그렇듯 의욕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의욕의 의도가 의심받기 시작하면 이미 의욕은 야욕이나 욕심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서울시내버스 개편의 의욕과 의도 사이에 끼어서 막막한 울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의도처럼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과도한 의욕에 우리가 흥분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익숙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아직까지도 복마전 같은 버스 노선도 앞에서 황망하기만한 것은 오만한 관료의 말처럼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청계천 주변 상권의 붕괴와 노점상들의 막막한 생계 앞에서도 우리에겐 아직 기대가 있었습니다. 21세기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서울시가 변하고 있구나 하는 낙관적인 기대는 기공식 현장의 연막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시장에게 시민인 우리가 최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생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버스는 시민의 발입니다. 그것도 넉넉하지 못한 시민들의 발입니다. 7억원이 넘는다는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어떤 이의 발이라면 그것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지독한 여지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을, 아니 꼭 알고 있어야만할 시장에게 말해야 합니다. 청계천은 복개했다 복원할 수 있지만 이번 버스 개편으로 입은 시민들의 가슴에 상처는 좀처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슴에 상처를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것이 생태도시(문화를 드러낸 청계천이 서울을 얼마나 생태도시로 만들지는 의문이지만)가 가져올 안락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얼마 전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저는 묘한 흥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이나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 하나를 남기고 떠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남자의 흔적을 평생 쫓아가는 여자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차라리 상투적이었습니다. 현실과 허구, 실제와 영화가 구분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독특한 연출도 신선하긴 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세월과 함께 진행되는 주인공의 삶은 <포레스트 검프><효자동 이발사>에서 보았던 것이니 그것도 저를 압도할만한 것은 아니었겠죠. 제가 압도된 것은 엉뚱하게도 주인공 치요코의 단호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그 유명한 이 작품의 대사가 회한이나 자조의 울림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체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배워가는 치요코의 모습에서 엉뚱하게도 그렇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면 억지일까요?

중국 장가계에 가면 토가족이란 소수 종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무척이나 즐기고 친절한 이 작은 체구의 소수 종족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결혼 풍습 때문입니다. 토가족의 여인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발등을 은근하게 밟아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다고 합니다. 발등을 밟힌 남자는 여자의 집에 찾아가 하루를 자야하는데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새 노래를 불러 예를 차리고 아침에 나와야 한다는 그들의 풍습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도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여자의 선택과 남자의 선택을 모두 존중해주는 그들의 지혜는 그들이 즐기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선택은 주임됨을 전제로 합니다. 시간은 참 단호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부와 상관없이 잘도 흘러갑니다. 물론 그 시간의 격랑 속에는 늘 어처구니없이 떠밀려가는 우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예산과 불편함을 강요당하면서도 서울시내버스 개편을 개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했기 때문이겠죠. 시행 전에 다양한 방식과 여러 시행 시기 중에서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겐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인지 <천년여우>의 치요코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자기 삶에 대한 단호한 선택과 토가족이 보여주었던 배려를 전제로 한 선택이 우리에게 더욱 아쉬운 것이겠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보셨습니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이 작품의 경고는 아직 유효하기만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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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을 참 잘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 있고 또렷하게 제 생각을 말하고 다른 이의 동의를 얻어내는 그 과정이 뛰어난 다른 무엇을 갖지 못한 제게는 내세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말이 어려워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잘 모르는 이들을 앞에서 말하는 것보다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알기 때문에 말 같은 말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봅니다.

요즘 어록(語錄)이 차고 넘칩니다. 말의 기록인 어록이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되고 있다는 말이겠죠. 김제동, 노회찬, 차명석, 한기주, 이신영, 이주일 등등 인터넷에는 날마다 어록의 신화가 이어집니다. 화려한 레토릭, 과도한 진솔함, 저돌과 우회를 두 손에 들고 치는 강렬함, 삼류 철학자의 금언과 같은 단호함,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실됨까지 모든 어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말의 가치요 무게입니다.

말의 가치는 그것이 지금 이곳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렸습니다. 노회찬의 말들처럼 현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든, 한기주의 그것처럼 현실과 거리를 두고 낭만적 환상을 만들어내든, 혹은 이주일의 말들처럼 자신이 삶아온 세월을 거르고 걸러 쏟아놓는 말이든 간에 그것은 지금 이곳의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현의 경쾌한 은빛 언어의 화려한 수사와 속도보다는 홍상수의 쓴 소주 같은 비굴한 일상의 말들을 더 좋아합니다. 같은 이유로 <야심만만>에서 기획 상품처럼 쏟아내는 김제동의 개그보다는 <이소라의 음악도시>에 나와 고민 상담을 해주는 그의 거친 일상어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럴듯함으로 가장하고,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교조적인 모습이 아니라 과장과 진솔 사이를 오고가며 빠른 속도로 스스로 균형을 만들어가는 그의 대구사투리를 좋아하는 것이죠.

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이 말하는 이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는 어처구니없는 대중스타들도 있지만, 우리와 함께 시간을 나누며 늙어갈 스타들은 말을 함으로써 더욱 빛나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것은 물론 화려한 수사나 훈련된 화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생활의 넓이와 세월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말의 주인은 내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지금 이곳의 어록에는 내가 없습니다. 다양한 채널과 많은 발언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어록을 원하며, 그것은 대부분 다른 이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심과 지향을 상실한 혼돈스런 시대를 내가 아닌 누군가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말을 길잡이로 삼아 건너고 싶은 욕구들의 표현이 어록의 홍수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요?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가 했던 말처럼, 문제는 다른 이의 말이 도움을 될지언정 구원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스스로의 구원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머리 위에 전등을 붙이고 걷는 광부와 같이 스스로 삶을 데리고 걷는다는 심정으로 멀리 자신을 인도할 자신의 어록들 말입니다.

자신의 어록이 온라인에 있느냐 오프라인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블로그가 되었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되었든 아니면 아날로그 스타일의 노트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 어록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중심이 되고 자기 삶을 견인할 수 있는 지향으로서의 어록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방문자가 되어 리플을 달아보면 어떨까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소 환자스럽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낯선 우리와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낯선 나와의 조우만큼 스스로를 갱신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말의 주술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청준의 단편 <예언자>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말에는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어록을 만들어가며 말을 통해 자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가파르게 몰아보고 때론 곡진하게 위로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린 오늘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샤먼입니다. 전 저의 말을 믿기로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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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관절인형은 피노키오가 아닙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소통하지만 관절인형은 자신을 입양한 주인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랑할 대상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지만 피노키오는 소통을 통해 성장하여 사람이 되지만, 관절인형은 섬뜩한 변하지 않음으로 결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관절인형에 열광하는 마니아의 숫자가 늘고, 구입을 입양이라 부르고, 의상은 물론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바꿀 수 있다지만 관절인형은 그저 인형일 뿐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핵가족 시대 외동들의 형제에 대한 욕망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관절인형에 대한 열광은 소통하고 싶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욕망의 드러냄이며, 동시에 현실원칙에 억눌린 자기표현 욕구의 극단화라고 할 때, 그것은 외동들의 자기 사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면 외롭지 않겠지만 그 부대낌이 주는 번잡스러움이 싫다는 것이지요.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할 때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한 존재를 익명의 웹 공간에서 자랑함으로써 외로움을 보상 받으려는 자폐적 자위가 관절인형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죠.

어디 관절 인형뿐이겠습니까? 그것은 <겨울연가>를 위시한 최근 드라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코드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지독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차고 넘칩니다. 준상, 유진, 상혁, 채린이 보여주는 일방적인 사랑은 자기집착에 가깝습니다. 사랑이 타자와의 대화적 소통이라고 할 때,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일방적일 뿐 소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년여우>의 치오코가 우아하게 표현했던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 자기집착의 다른 표현이라면 억지가 되나요? 그것은 왕가위의 <동사사독>이 소통되었지만 지속될 수 없었던 운명적 사랑의 어긋남과는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기표현입니다. 요즘 가장 손쉬운 자기표현으로 선택하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 열품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보기만 해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젊은 시간들을 기록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야겠죠. 더구나 보이는 모든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좋겠죠. 턱을 약간 당기고 얼굴을 약간 틀어서 찍으면 자신의 얼굴이 더욱 예쁘게 나온다던 얼짱의 인터뷰가 당당하게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 솔직함과 당당함이 별로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해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테고, 남기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멋진 자신의 모습을 많이 발견한 것일 테니 허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을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싸이 미니 홈피에 올려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무모한 자신감의 기저에는 자기에 대한 거침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으로 주로 드러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가꾸게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기사랑의 온전한 모습이냐에 달린 것이겠죠. 나는 너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 없이 나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너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은 곧 타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누락된 자기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욕심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안타가운 것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욕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로 인해 자기에 대한 사랑이 데려올 수 있는 자기 삶에 대한 멋진 연출이나 진지한 성찰 따위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금 이곳에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더욱 멋지게 자신을 사랑하자고.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집착일 뿐이라고. 그것을 넘어서야만 관절인형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자폐적 자위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저는 요즘 운동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004년 《오픈아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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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몇 주 전 휴일이었다. 이번 달 안에 마무리할 책 원고 때문에 몇 주째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전날 모임에서 술을 마신 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원고는 마무리해야 하는데 숙취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서재와 거실 소파를 오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 소리 했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젊은 시절 친구들이 즐기던 당구도 배우지 않았고, 골프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음악 애호가도 아니고 요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하나 들라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것일 텐데, 그것도 혼자 볼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실 남는다고 의식되는 시간도 거의 없다. 그나마 남는 시간도 대부분 연구와 상관되는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책을 본다. 남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고, 대부분 혼자서 하는 일이다. 시간을 내는 일도, 하는 일도 없으니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다.

의사인 고등학교 친구 A는 몇 해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 문화센터에 찾아가서 그림을 배워 취미로 꾸준히 그리고 있단다. 그림뿐만 아니라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아들을 태워주다가 자기도 아이스하키를 즐기게 되었단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빠들과 아예 팀을 꾸려서 정작 아이는 아이스하키를 그만두었는데 아빠들은 계속하고 있단다. 어디 A뿐이랴? 아침마다 산을 찾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리는 B, 주말마다 자전거 여행을 보여주는 C,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한 D,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 책을 낸 E, 일요일 아침마다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동문들까지 참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지낸다. 사실 그동안 그런 재미를 꿈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일을 줄이고 조금 여유를 찾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을 줄이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 분주해질 뿐이다. 서재에는 글씨를 쓰겠다고 모아둔 붓과 등록하고 가지 못한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과 출사를 꿈꾸는 카메라 가방은 먼지만 뽀얗게 덮여 있다. 강박처럼 구입하는 신간들은 연구실과 서재에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여있다.

생각해보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오늘까지의 자부일 뿐이다. 지금껏 부지런히 살아왔다는 자부만으로는 현재의 삶도 재미있게 만들지 못하는데 미래의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가족을 위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으니 노년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그 또한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들, 재미있는 일들 중에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고 가능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시간을 선별하여 줄이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내가 지난해부터 운동을 시작한 이유리라. 몸에서 땀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아내가 벌써 1년 넘게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운동을 다녀오면 온몸이 아프다고 즐거운 엄살이다. 바른 체형의 아내가 원하는 것이 군살 없는 몸매겠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건강하고 즐겁고 그래서 당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젊어서는 내가하는 일이 제일 흥미롭고, 성취할 때마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어서, 굳이 다른 재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책상이나 강단 위에서가 제일 편하다. 편한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닐 텐데, 그쯤에서 만족한다. 일상의 분주함과 피로는 관성이 되고, 게으름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인 무엇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렸다. 맹목적인 성실과 지향 없는 부지런함은 그저 매일매일 고단하게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스스로 물어본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매일경제>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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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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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닻 혹은 덫

제프 르미어, 수중 용접공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지고 있는 것은 잃은 것의 맞짝이고, 기억하는 것은 잊은 것의 맞짝이다. 잃은 것은 찾으려 하고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잃은 것을 찾으려하고 잊은 것을 기억해내려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행위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을 찾고 상기한다한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제프 르미어의 수중 용접공은 정체모를 환상이 소환하는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소환한 것은 단지 아버지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외면하려 했던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시추선에서 수중 용접공으로 일하는 잭 조지프는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저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해저에 있는 잭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생생했던 순간 지상에서는 사고로 인지된다. 정체모를 소리가 소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죽음과 사라진 회중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다 속 보물을 찾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며 현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중 탐사에만 몰두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만삭인 아내를 홀로 두고 맹목적으로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보물과 일에 대한 몰두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 그것은 단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다. 가장이든 아버지든 간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했던 욕망을 괄호 속에 묶고 한층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성숙도나 책임감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나 곧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잭의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행동들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다.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삶을 지탱해주고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보물탐사와 수중용접에서 찾은 것이다. 잭이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해저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 까닭이다.

잭은 수중의 절대 고독 속에서 일종의 환청과 환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잭은 아버지의 죽음과 회중시계의 연관 고리를 찾고, 아버지 죽음의 또 다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울러 그것은 잭이 몰두하던 해저, 잠수, , 과거 등으로부터 지금 이곳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아버지와 변주된 데칼코마니처럼 유사성을 보이던 잭이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분리를 통해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리는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직시이며,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현실 수납을 의미한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분리가 선명하다. 전자가 현실의 질서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잭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지만 잭은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잭의 그런 모습은 현실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잭이 찾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려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잭의 경우는 그러한 외면의 동기 저변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보물찾기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우선 찾아야 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보물인 아들 잭이 좋아하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절묘한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보물찾기가 침몰한 스페인함선의 금화들이 아니라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지극히 소박한 서사에 머물 뿐이겠지만, 그것을 아들 잭의 출산 즈음에 환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사의 울림을 다양화한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이 작품은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이분적인 구도에서 전자만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잭의 데칼코마니 구도와 잭이 체험하는 환상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양자가 비로소 잭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닻(anchor)이 배가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덫(snare)이 되기도 한다는 삶의 이율배반(antinomy)을 이해할 때, 그 이해 위에서 스스로 성인으로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수중 용접공을 읽으며 강도하의 큐브릭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강도하의 큐브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미우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를 잭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렸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과잉일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처럼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를 풀 듯 텍스트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작화 면에서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한다. 텍스트 전체를 하나의 작화스타일로 유지하기보다는 장면과 상황에 적합한 자유로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서사 전체의 흐름을 작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며 시도다. 거기에 대사의 많고/적음이나 완급에 맞추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러한 작화스타일은 텍스트 전체를 잭과 동반자적 시점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장의 유지뿐만 아니라 서사에 대한 몰입에 크게 기여한다.


아버지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나 그것을 찾아가는 잭의 모습이 수직 구도로 구현되고 있다면 현실이나 일상은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현재의 삶, 자신을 기다리는 일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장면(196-197)의 연출은 백미다. 시추선을 향해 나아가는 잭을 중앙에 배치하고 Z축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장면을 X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잭의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잭 자신을 Y축으로 중심에 두고 과거의 아버지와 자신을 X축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112-113)에서 시도하여 학습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207)를 그를 수면위로 끌고 올라오는 장면(212)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연출인가? 회중시계와 아버지 죽음을 연결시켜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금 잭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회중시계를 매개로 분리되었던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화해하게 함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열려주는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데이먼 린들로프가 환상특급 운운한 것은 오히려 텍스트 리터러시에 장애가 된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환상특급이 주는 분위기나 효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잭의 내면심리에 집중하여 읽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다소 안정적인 서사구조와 보수적인 주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수중 용접공을 읽는 내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기저귀의 메타포가 떠올랐다. 사랑은 빨래하는 어머니가 아가의 허리춤에 매어둔 기저귀처럼 보호하는 것인지 구속하는 것인지, 그것이 닻인지 덫인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거야.”(188)라고 깨닫는 장면의 배경이 러스티 앵커인 것을 근거로 수중 용접공이 닻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 해석의 과잉일까? 사랑은 역시 어렵다.

<만화규장각>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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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님>, 칭찬해? 칭찬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이가 들수록 소란스러운 것이 싫다. 채널을 바꾸다 만나게 되는 <아는 형님>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교복을 입는 설정도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고, 연예인 신변 퀴즈를 풀며 정답을 맞히는 과정도 무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진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가 지난 주말 마침내 <아는 형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프로모션 클립이 하도 유쾌해서 찾아본 것이었다. 게스트였던 걸스데이의 털털함과 리액션도 그 유쾌함에 한 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포맷의 차별성에 있었다.


교실을 배경으로 전학생이 오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콘셉트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메인 MC와 보조 진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일곱 명의 집단 진행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보니 게스트가 진행을 주도하는 역할 역전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점, 각자의 캐릭터 설정에 따라 게스트가 빛날 수 있게 조력자로서 충실한 뒷받침을 수행한다는 점, 포맷 속 캐릭터와 실재 캐릭터 간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출연진을 탈신비화하고 있다는 점, 교실이라는 공간을 토크, 퍼포먼스, 기타 활동의 무대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차별화 전략으로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아는 형님>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진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게스트의 관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게스트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전학생과 재학생이 함께 어우러져 놀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 모습을 즐긴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더구나 전체를 반말로 진행함으로써 출연진의 연령 차이와 그에 따른 서명 등이 자연스럽게 소거됨으로써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아는 형님>의 가장 큰 경쟁력은 특정 포맷을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포맷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저에는 퀴즈와 노래방 문화를 결합시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경우처럼, 다양한 장르나 포맷을 즐거움을 중심으로 결합시키는 과감한 도전이 있다. <아는 형님>의 대부분 코너는 어디서 봄직한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맥락(context)에서 구현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 과감한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화의 도전은 지금까지 즐거웠던 만큼 앞으로 더욱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아는 형님>이 미덕으로만 가득 찬 프로그램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에 프로그램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형님>이 공허한 말장난, 고착화된 성역할을 확대 재생산, 연예인의 신변잡기중심 진행 등의 비난에서 자유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이 시도한 새로움의 도전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어디 <아는 형님> 뿐이겠는가? 단지 밥 세끼 먹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즐거움을 주었던 <삼시 세끼>, 뚱뚱한 먹보들 네 명이 그저 먹는 과정만 보여주어도 재미있는 <맛있는 녀석들>, 성장과 오디션을 결합시켰던 <프로듀스 101>, 모창 능력자를 찾아 추억 속의 스타를 현재로 소환했던 <히든 싱어> 등 최근 차별성으로 승부했던 포맷들을 상기해보자.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 프로그램들이 현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 속에서 시청자의 향유 코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파격적인 차별화의 콘셉트를 과감하게 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을 흉내 내면 표절이고 스스로를 베끼면 매너리즘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이유로 황량해진 공중파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종편이 엄청난 자금으로 스타PD와 작가들을 스카우트해갔기 때문이라 핑계대지 마라. 스타PD와 작가들이 공중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하고 경직된 제작환경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직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향하는 뼈저린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이 콘텐츠 시장임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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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과 인터넷서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식탁에 앉아서 가계부를 정리하던 아내가 궁시렁거립니다. 아내는 곧 제 서재로 들어와 지난달 제가 산 책의 내역을 들이밀고 그 금액을 확인 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책을 조금만 사라고 부탁을 하거나 가계부를 가져가라고 협박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사고 싶은 책을 사지 말라는 것은 전투병에게 실탄을 아끼라는 것과 같다고 우기거나 아내의 분위기를 봐서 이내 꼬리를 내리고 다음달에는 책을 사지 않겠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모르겠습니까, 결혼 후 월말마다 반복되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싸움의 결말을. 사실, 주말마다 각 신문에서 알려주는 책 정보나 이메일로 날아드는 인터넷 서점의 신간 안내는 유난히 책 욕심이 많은 저에게는 참기 힘든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메모해두었다가 가능하면 제가 강의 없는 날에 집에 도착하도록 아내 몰래 주문을 합니다. 따라서 배달되온 책의 포장박스만 아내 눈에 띄지 않게 하면 완전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발각되고 저는 아내에게 비굴한 미소를 지어야합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는 제게 누이들과 당신의 구두를 닦게 하고 용돈 500원을 주셨습니다. 그 돈은 토요일 오후 축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분식집에서 300원짜리 라면을 사 먹거나, 모아두었다가 시장 입구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삼중당 문고나 500원 내외하던 헌 책들을 구입하는 데 쓰곤 했습니다. 시장 입구 노점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환한 형광등 불빛으로 빛나던 그 헌책방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점 앞에 쌓아두었던 헌책들과 그 사이사이에 싸한 냄새와 함께 따듯하게 타오르던 카바이드 불빛, 천장까지 닿아있던 책꽂이와 빼곡히 들어차있던 책들, 그리고 거기서 풍겨나온던 얕은 곰팡이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고 싶은 책들은 늘 주머니의 돈보다 많았습니다. 책을 읽어보고, 주인아저씨에게 그것의 가격을 몇 번씩 되물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주머니의 돈을 가늠하곤 했던 까까머리 소년은 사진 속의 그것처럼 나이를 먹지 않았나 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장바구니에 책을 담아두고 주문 여부를 놓고 몇 번씩 고민하다가 덜컥 일을 저질러버리니 말입니다.

가방에 교과서 외의 책을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으쓱했던 그 시절, 이어령의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은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완과 급을 조절하는 문자의 호흡과 유려한 레토릭,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 어디서도 읽어보지 못했던 독특한 관점을 새록새록 발견할 수 있었던 책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시기어린 질투는 저자가 강의하던 이화여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어이없는 열망을 낳기도 했으니, 지금으로서는 참 웃지 못 할 일입니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들은 오남매를 모두 일일이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여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책을 보며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이미 한국문학전집을 다 읽고,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적 호기심이 강했던 그 시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육체의 악령같은 책들은 얼마나 가슴 뛰는 체험이었는지. 이처럼 척박했고 때론 천박했던 제 독서 이력은 대학에 들어와 이청준의 소설을 만나면서부터 달라졌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제 화두였습니다. 이청준의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서 느끼던 즐거움과 막막함. 그 즐거움은 김현의 평론을 통해 몇 배 더해졌고, 막막함은 결국 제게 이론 공부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그나마 평단의 말석에라도 머물게 되었나봅니다.

이사할 때마다 책 때문에 이삿짐 센터에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하지만, 지금도 사야할 책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는 분주하다는 핑계로 서점에 가는 수고 대신 인터넷을 통해 책을 삽니다. 책장들 사이에서 꼼꼼하게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몇 번씩 망설이다 구입하기 보다는 인터넷에서 책에 관한 정보, 적립 포인트, 할인율 등을 확인하고 책을 구입합니다. 목돈이 생기면 사고 싶던 책들을 잔뜩 사서 두 손 가득 들고 힘들게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느끼던 정신적 포만감보다는 얼마나 빠르게 배달될 수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인터넷 서점의 경제성과 편의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카바이트 불빛과 형광등이 어우러진 얕은 곰팡이 냄새나는 헌책방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을 하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책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겠지요.

여덟 살배기 첫째가 책 몇 권을 들고 제 서재로 들어옵니다. 뒤이어 책을 거꾸로 들고 네 살배기 둘째가 들어옵니다. 둘째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하지만 제 나름대로 책을 봅니다. 아마 녀석들에게 책은 아직 읽는 것만으로 즐거운것들이겠지요.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며, 저는 아마 제게 필요한 책들을 언제 주문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애경 사보> 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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