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토럴 시대의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은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하는 능동적인 소통이다. 가치나 즐거움을 지나치게 교조적인 의미나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가치, 즐거움, 능동적 소통은 스토리텔링의 특성을 드러내는 핵심 요소다. 축자적인 의미에서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방식(tell)을 통하여 향유를 강화하는(ing)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심도 있게 읽어보면, 스토리텔링은 향유자의 적극적인 참여 과정을 통해서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일체의 소통 과정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스토리텔링은 그것이 통용되는 문화권, 적용 분야 및 해당 장르,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에 따라 상이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합의나 실체에 대한 규정은 지극히 개방적인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


존 라세터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로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압도한 픽사 애니메이션의 핵심은 스토리다. 사실 이 말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는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현 방식 그리고 향유자와의 소통이 어우러지는 일체의 과정, 즉 스토리텔링이다.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즐거움은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어린 시절 장난감, 주제가(You've got a friend in me), 성장과 이별의 두려움과 같은 보편적 정서의 유대 요소들과 패러디, 대구와 강화를 통한 안정적 서사 구조 구축, 속편으로 수렴하는 프리퀼(prequel)의 적층적 활용, 집단적인 중심 캐릭터 설정과 편마다 새로운 캐릭터의 보강을 통한 서사의 심화, 애니메이션의 본질인 투명한 액션의 효과적 구현 등을 통해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리텔링의 문제는 스토리와 구현방식 그리고 향유가 어우러지는 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느냐에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은 스토리텔링 전략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을 압도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환경은 정보의 복합성, 쌍방향성, 네트워크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은 무엇보다 향유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존 닐슨은 디지털 문화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형질의 스토리텔러를 디지털 호모나랜스(Digital Homo Narrans)’라고 부른 바 있다. 그들은 디지털 문화 조건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디지털 호모 나랜스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포털, 동호회 등에서 문자·그림·사진·영상 등을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스스로 이야기를 생산-공유-전파하는 주체적인 스토리텔러다. 적극적인 생산자이자 향유자인 그들에게 더 이상 생산과 향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단지 소통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은 가치 있는 즐거움 창출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한다.

초당 3,500장의 사진을 업로드하는 페이스북과 분당 72시간의 영상을 업로드하는 유투브는 이미 격렬하게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되었다. 누가 지시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데도 각종 디바이스를 가지고 다양한 플랫폼에 접근하여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스토리텔링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유전형질을 지녔다. 그 형질의 특성을 읽고 싶다면 당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열어보라. 향유자의 체험에 기반한 자발적 생산과 창작 그리고 무한 공유의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층위에서 격렬하게 증식하고, 공유로서 더욱 강력한 맥락을 생산하고, 그만큼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열고 있지 않은가?

헨리 젠킨스도 󰡔컨버전스 컬처󰡕에서 지금 이곳의 향유에 주목하고 주체적인 체험의 생산성과 향유의 자발성 그리고 공유의 즐거움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그가 제안한 장르 간, 플랫폼 간, 저자와 독자 간, 생산과 소비 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은 디지털 문화 환경 속에서 스토리텔링의 핵심을 지적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에 의해 이미 완성된 스토리텔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향유자에 의한 참여중심, 과정중심, 향유중심의 스토리텔링이다.

그래서 타이 몬터규는 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두잉(story-doing)을 주창한다. 실천으로서의 스토리를 강조하는 스토리두잉에서 핵심은 향유자가 어떻게 그 스토리에 참여-반응-생산-공유하는 실천을 활성화할 수 있느냐이다.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스토리를 실천하고 자기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동안 향유과정의 이면에 잠재된 형태였지만 이제는 실천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필수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기획된다. 스토리두잉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신발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를 어려운 이에게 기증한다는 기부 실천행위를 브랜드 전략으로 활용한 탐스, 자신이 만든 디지털콘텐츠를 등록하고 한번 다운로드 받을 때마다 1.25달러씩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식량으로 기부하는 ‘1.25 미라클마켓’,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남미의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공정무역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향유자가 어떤 형태로든 스토리에 참여해야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스토리두잉의 전제는 스토리텔링의 핵심요소였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최근 유명 인사나 스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Icebucket challenge)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부문화를 환기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나 스타가 참여하고, 그것이 딱딱한 기부행사가 아니라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로 즐겁게 진행하고, 참여자가 세 명의 다음 사람을 지정하는 기록을 웹에서 공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기부라는 가치 있는 행위를 간명하게 제시하고 즐거운 퍼포먼스로 3배씩 확산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그 효과면에서도 탁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곳은 디지토럴의 시대(Digitoral Era). 죠나 삭스가 창안한 디지토럴은 아이디어의 창조와 전파에 향유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적합한 아이디어만 살아남던 구전전통이 디지털 문화환경과 창조적으로 결합한 양상을 말한다. 구전전통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곧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스토리텔링은 고정되지 않고 향유의 횟수만큼 격렬한 활성화가 이뤄지며, 그 활성화의 정도가 스토리텔링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한 구전전통의 현재적 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문화 환경 덕분이다.

세계의 콘텐츠 시장을 주도한 디즈니 회장인 로버트 아이거는 디지토럴 시대 스토리텔링이 맞춤화된 경험고치 벗어던지기라는 형태로 구현될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및 빅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화된 경험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경험이 공유의 기술을 통해 고치 벗어던지기를 통해 무한 연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레미제라블>과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좋은 예이다.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한 스토리를 최신의 최고 기술로 구현하고, 향유자의 수준과 취향에 소구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텍스트에 수렴하고, 거기에 뮤지컬 넘버들을 삽입함으로써 텍스트 전체가 아니라 뮤지컬 넘버별로 공유 확산할 수 있는 전략을 전면화하였다. 그 결과, 당신은 지금도 <레미제라블><겨울왕국>의 뮤지컬넘버들을 흥얼거리지 않는가?

IT 강국 한국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이야기 하지말자. 디지털 문화 환경을 어떻게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획할 것인가, 향유자별 맞춤화된 경험과 그 경험의 무한 공유를 지속-확산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무엇인가, 정서적 보편성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자. 다시 문제는 체험, 참여, 공유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방송작가> 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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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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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비평,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 글은 지금 이곳 만화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만화비평론을 구성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해설중심의 의전비평,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무모할 정도의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독립적인 텍스트로서 즐길 수 있는 만화비평을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만화담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채로운 그래서 살아있는 만화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만화비평의 시론을 도모한다.

 

 

1. 만화비평의 구조적 부재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일지는 몰라도 만화비평은 부재중이다. 열정적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은 구조화된 침묵이거나 부재다. 만화비평의 정체, 방법론, 역할 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없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만화비평이 신뢰할만한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웹툰을 포함한 만화산업 전체의 폭발적인 성장내지 변화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비평의 오늘은 차라리 부재에 가깝다.

비평은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속에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상호 성장하는 것인데, 콘텐츠의 성장만 독주할 뿐 비평이 자기 정체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도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기형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비평의 형질 변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지한 분석 및 해석 중심의 비평에서 가볍고 쉬운 정보 중심의 비평으로의 전환이거나,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비평가와 향유자의 직접 만남을 통한 비평방식의 변화이거나 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긍/부정 가치 평가를 떠나서) 비평의 부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으로서의 자기 정체와 역할에 대한 변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비평이 선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임을 고려할 때, ‘지금 이곳에서 만화비평의 침묵은 오히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내재적 측면과 외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에 대한 변별적 자의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만화비평의 토대가 되어야할 만화미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화와의 건강한 긴장관계 형성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외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전문 발표 매체와 다양한 관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가 집단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만화와의 비판적 거리 및 권위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만화산업 생태계에서 만화비평의 산업적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만화산업이나 클릭수나 댓글수로 대중성을 평가받고 있는 웹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만화비평 그 자체의 산업적 수요는 미시적 차원에서 결코 높지 않다. 더구나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로 만화의 향유가 가능해짐으로써 향유가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팬덤(fandom)이 형성됨으로써 향유자는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향유자들은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형태로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향유를 통하여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비평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그 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만화비평의 정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동시에 전문 비평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화비평의 산업적 수요는 현격하게 감소하였고, 그나마도 본격 비평을 전개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원고 분량을 요구하다보니 정치한 분석과 풍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심도 있는 비판이나 평가보다는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의 비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곳 만화 생태계는 이글에서 당위적으로 요구할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비평을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만화비평이라고 일컬어지는 1927년 권구현의 <신문 삽화 만평>에서부터 대중문화론과 함께 주목받게 되는 1970년대 김현과 오규원의 비평을 건너 1990년대 만화비평의 대중적 확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보면, 비평의 부재를 비판하는 현재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문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양질의 텍스트가 쏟아지던 1990년대 초반을 상기해보자. 대중적인 호응과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지닌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평가해보면 문화연구라는 맥락이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만화비평을 풍요롭게 생산했고,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많던 비평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토록 풍성했던 관점과 해석의 지평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만화비평에 대한 접근이 단행본 한 권이나 비평 하나 정도 수준의 지속성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외재적인 이유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전문적인 비평발표 매체가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 보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만화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만화비평의 내재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1990년대 비평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정말 비평의 황금기였다면, 만화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적인 특성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만화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고 생산된 비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만화비평은 다시 원론 수준으로 소박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만화비평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첨병이라고 회자되는 만화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비평에서 만화 장르 자체에 대한 도발적인 자의식보다는 만화를 통한 문화비평의 흔적이 더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의 부재는 단지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한 자의식이나 역량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만화생태계라는 거시적 차원과 만화비평생태계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 공시적 접근과 만화비평 역량의 축적 과정이라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부재는 현재적인 문제, 만화비평만의 문제,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2. 만화 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비평은 차가운 글 읽기따뜻한 의혹의 산물이다. ‘차가운 글 읽기란 섬세하게 작품을 읽는 데서 출발하며, 예리한 푸른 날의 칼로 마지막까지 결을 내는 분석 과정이다. 아울러 따뜻한 의혹이란 푸른 날로 조각 낸 섬세한 결들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엮고 그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삶을 견제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이 두 행위 모두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따뜻한 긴장 속에서 작품의 의미 지평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삶과의 연관은 자기 증식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이다. 그 대화는 텍스트 안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성찰하고 밖으로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규명하여 그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섬세한 독법으로 꼼꼼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의 깊이를 탐구하고 넓이를 확장하는 지속적인 과정인 이유다.

만화비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변별적 특성을 바탕으로 만화비평의 역할과 상관하여 조형적(plastic)인 관점에서 그 변별성을 파악해야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의 형질 변화와 비평에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서 조형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만화비평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가의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은 해당 텍스트를 비평을 해야 할 이유에서 출발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향유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화비평에 대한 비평가의 자의식은 지금 이곳 만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의혹에서 시작하여 텍스트의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긴장이다.

만화비평의 자의식 부재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늘 게재할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해야할 작품보다 게재하고 싶어 하고 비평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작품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권위 있는 신뢰할만한 매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며, 더구나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형 포털이나 출판사의 의뢰에 의한 의전비평이나 주례사 비평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비평 자체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얄팍한 전술이다. 이와 같이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의 현재적 양상을 수렴해보면, 대부분 비평가의 관점은 은폐된 채 해설 중심으로 전개되며, 텍스트에 대한 평가가 맹목에 가까운 긍정과 칭찬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으로 인하여 건강한 비평담론 생산이 차단되고,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작 비평이 기능해야 할 상황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선정성 논란을 상기해보자. 작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천국의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비평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만화와 연관하여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텍스트 중심의 탐구를 통한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 어떤 비평도 옹호의 반대논리를 펴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비평이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읽기와 심도 있는 해석을 진행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렸었다면, 선정성에 대한 비평의 선제적 탐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선정성이라는 소박한 기호에 치명적인 폄훼를 당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화의 비전문가인 20대의 새파란 검사로부터 일본만화를 베낀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2012년 귀귀의 <열혈초등학교>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폭력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의 만화 리터러시를 고민했던 비평이 있었는가? 비평이 제몫을 다했다면 <열혈초등학교>의 표면에 드러난 폭력성이 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 심층의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언론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귀귀의 B급 정서와 표현이 그만의 표현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 텍스트에 드러난 폭력의 컨텍스트였음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바이스의 발전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다가 모바일 만화 시장을 무료화했던 2009년의 네이버 웹툰 논란을 상기해보자. 웹툰시장의 지배적인 사업자인 네이버의 일장적인 앱툰 무료화의 부당성에 대하여 비평은 무슨 의견을 제시했는가? 웹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료라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를 만든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앱툰시장 마저 다시 무료화하는 상황은 만화가 비평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2011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2015년 레진코믹스 사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의도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어린이를 볼모로 부모를 위협할 때, 그것의 첫 타겟이 만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비평은 생태계적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는 비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할 때 파악 가능하다. 만화 텍스트를 원천으로 출발했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지만 만화비평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비평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화 자체의 문법과 대타적(對他的) 상관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 요소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화는 큰 변화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유통 플랫폼, 과금체계, 디바이스의 변화에 다른 텍스트 구현 및 향유 방식의 변화가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텍스트의 형질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변용함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 비평의 부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곳 만화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그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의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 그로 인하여 대형 포털 중심의 웹툰 생태계를 추수할 뿐 웹툰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웹툰이 원천콘텐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모든 평가 기준이 대중적 지지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지표에 종속되거나 특정 타겟의 취향을 반복 재생산하는 지극히 소모적인 대중 인정투쟁 양상을 드러낸다. 웹툰 시장에 있어서 대형 포털의 권력화는 단지 원고료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취향의 인정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견실한 비평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지금 이곳의 비평은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웹툰 생태계의 기형화, 황폐화를 낳고 있다. 지속적인 위기의 수사가 식상할 정도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위기의 양상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은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패배주의를 낳고 그만큼 그 종속도는 더욱 가중될 뿐이다. 만화담론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창작을 촉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할 만화비평이 스스로의 몫을 방기함으로써 비평 자체는 물론 만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만화비평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화처럼 변해야 한다. 만화가 변하듯 비평의 정체성도 그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와 구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의 저류에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흘러야 한다.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만화와 비평의 기계적이 교합이 아니라 만화와 비평이 대타적 긴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발견해 나가야할 무엇이다. 왜곡의 미학, 시간과 공간의 상호교차적 대치, 칸사이의 호흡,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 분절의 연속화에 기반한 서사 구성 등과 같은 만화미학의 기본 요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도정(道程) 위에 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살아있듯 만화비평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의식을 기반으로 만화와의 생산적인 긴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3. 만화 비평, 담론의 장을 키우자

 

건강한 만화비평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비평 담론(discourse)의 장을 구현해야만 한다.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미학과 비평윤리의 결합이 빚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담론은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는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인 담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그것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만화담론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구성에 가까우며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담론에 기반한 비평담론을 창의적 결합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건강한 담론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충돌과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만화비평 담론은 신/, 지배/종속, 올드미디어/뉴미디어, 보수/진보, 존재/당위, /그림, 과장/축소 등과 같은 만화담론의 역동적인 대립쌍들이 비평담론과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 승인과 거부, 출현과 사라짐 등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뉴미디어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시대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려는 전략이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소로 등장하게 될 향유의 활성화를 전략역시 만화비평의 영역에 망설임 없이 넣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은 비평이 그렇듯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만나서 비평의 장()을 이룬다. 구현 매체, 유통 플랫폼, 장르분법, 지배적 언어, 사회문화적 공인과지지, 사회적/경제적 보상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며, 비평의 성격에 따라서 구성 요소나 층위를 결정한다. 특히 전제 한 바와 같이 만화의 특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만화비평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한다.

만화비평의 담론은 만화에 대한 비판과 담론 생산은 물론 특정 사안의 첨병이거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맥락과 이론을 수렴해야 한다. 만화담론을 선도하거나 자극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필요한 요소들을 창발적으로 수렴함으로써 현재적 문제는 물론 예견된 갈등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현재적 고민은 다양하다. 새롭게 급부상하여 시장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웹툰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의 정체와 지향 그리고 기존의 만화와의 차별성 확보, 앱툰과의 변별,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중심 매개로서의 역할 등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 구성을 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래픽 노블역시 웹툰과 같은 모색과 탐구의 짐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만화를 둘러싼 고민들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내재적/외재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텍스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시장 가치 및 확대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화비평 역시 이러한 다양성에 부응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담론을 포괄해야 한다. 적어도 만화비평이 활성화되고 보다 생산적인 양상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시학이 아니라 포괄의 시학에 기반한 수렴적인 담론체계를 지행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만화비평은 만화에 최적화된 비평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비평이 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개개의 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콘텐츠의 특성에 최적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은 문학의 것을 빌려온 것 뿐이다. 영화는 최근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보다 구술언어 중심 현장전달 중심의 비평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의 부상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가장 산업화된 영화의 발빠른 행보 역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다른 아니다. 그러므로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텍스트를 딱딱하고 무거운 문자중심의 비평으로 한정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 공감의 보편성, 이해의 용이성 등이 어느 무엇보다 높은 만화의 특성에 걸 맞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탐구해야함은 물론이다. 만화의 즐거움을 분쇄시키는 비평은 어떤 이유로도 온당하지 못하다. 만화가 즐겁듯 비평도 즐거울 수 있는 독립적인 즐거움 창출이라는 전제로 지속적인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만화비평의 방법론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젊은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장르가 된 영화가 강한 이유는 수렴중심의 개방체계에 있다. 경쟁력 있고 소구력 있는 방법은 모두 창조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자기화하는 영화의 전략에 주목해보면, 만화비평도 활용가능한 방법론들을 개방적으로 수렴하여 그 적실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화 일반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기존의 역사주의, 형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탈구조주의, 실리주의, 독자중심, 페미니즘 등등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고 심도를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화미학 안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부터 집요하게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정체와 역할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다분히 당위적 요구에 가깝다. 실천의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은 이제부터 실천을 통해 고민할 바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크리틱M>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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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

지미 볼리외,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야마모토 나오키의 내일 다시 전화할게와 지미 볼리외의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함께 읽은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르기에는 두 작품 모두 도발의 강도나 환기의 궁극이 매력적이다. 야마모토 나오키가 일상 안에서 꿈꾸는 혹은 조금 비껴서면 가능할지로 모를 섹스로 각자의 성적 판타지를 소환하고 있다면, 지미 볼리외는 자유와 광기의 당당한 질주와 동력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구속 안에서 각자가 비밀스럽게 꿈꾸는 소심한 판타지로 그 안에서 향유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후자는 각자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유와 광기의 질주를 보여준다.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290쪽의 부피가 최소한의 서사 라인만을 갖추고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에 충실한 자유를 연출한다. 이 작품의 서사라인을 따라가면,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지독한 패러독스의 영화제목이 아닌가?)의 수익으로 구입한 코트 노르의 호텔에서 루이, 코린, 뮈리엘, 레옹스가 벌이는 광기어린 휴식을 만날 수 있고, 코린을 잊지 못하는 아니, 아니를 열망하는 가리에피, 가리에피의 넘어설 수 없는 친구 시몬 등의 이야기가 그 사이사이를 자의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적 지향을 가지고 구조를 중심으로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내려는 일반적인 서사물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각 캐릭터의 욕망과 그것이 그려내는 자유를 연출할 뿐이다.

더 이상 낯설거나 부끄럽지도 않은 맨몸과 순간순간 자극적인 검은색 음모, 색과 구도 그리고 연출이 보여주는 비언어적 도발, 대상과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섹스의 자연스러움, 거침없는 대사와 장면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에로틱하기보다는 자유롭다. 그것은 단지 텍스트 전체적으로 펜, 색연필, 매직 등 자유롭게 사용되었다거나 칸의 구속과 순서적 읽기에서 벗어났다거나 2장의 모두부터 보여주는 소설과 만화가 적절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거나 하는 만화연출적인 차원의 문제만 아니다. 루이와 코린이 중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욕망과 행동에서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며, 그들 각자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놓지 않는 절묘한 긴장선 위에서 질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루이는 호텔을 구입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한 야유와 같은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을 만들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을 견디기 위한 위대한 변절이었고, 루이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세상의 원칙으로부터의 자유와 정주를 동시에 꿈꾸는 코린이 보여주는 긴장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지극히 연극적인 공간에서 작위적인 듯 보이지만 거침없는 자유와 광기를 그려내는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들은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다워지기 위한,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즐거워지려는 진솔한 자유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과격하고 포르노그래피한 장면연출은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그 지독한 장면들을 내면화하는 자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장별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290쪽의 어느 부분을 펴고 보아도 도발적이지 않은 시도가 없고, 그 숱한 도발이 환기하는 광기와 자유의 경쾌함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 전체가 아주 느슨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형태의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텍스트는 궁극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里程)의 기록이 아니라 순간순간 체험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완결된 서사가 보여주는 마지막 지평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체험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시작이 아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문득 낯선 장면에서 당신이 즐거울 수 있다면 돌아봐야할 것이다.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맨살을…….

<만화규장각>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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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분, 공유의 텍스트, <미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00만권 이상 팔린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같은 텍스트를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생산적인 소란스러움을 상상해보라. 향유자들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각자의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성(polyphony)의 소란을 만들어낼 때, 사회문화적 컨텍스트(context)로서 징후가 되고 담론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이미 우리사회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미생>이 웹툰은 11억 뷰 이상, 책은 200만부 이상, 드라마는 케이블임에도 불구하고 6.7%대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콘텐츠파워지수는 이미 정상에 있고, 100억 이상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수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미생>의 영향력은 놀랍다. 이토록 살아서 꿈틀대는 이 텍스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웹툰 <미생>의 힘은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성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도 있게 구현한 스토리텔링에 있다. 스토리텔러로서 윤태호 작가의 비범함은 초기작부터 이미 알고 있던 바이지만, <이끼> 이후 그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무척 실험적이고 그만큼 흥미롭다. <내부자들>이나 <인천상륙작전>의 스토리텔링이 <이끼>만큼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도만큼은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미생>의 완성도나 대중적 지지의 근저에도 스토리텔링의 실험이 있다. 종합상사라는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을 철저한 취재를 기반으로 확보하고, 바둑이라는 인생의 메타포를 그 위에 솜씨 좋게 얹은 후에 마이너리티적 감성의 자극을 통해 대중적 공감을 확산하려는 <미생>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압도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아직 살아있지 못한 마이너에 주목함으로써 향유자들이 스스로 심정적인 투사를 통하여 동일시 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이저의 성공신화보다는 마이너의 악전고투에 동조하는 대중의 심리적 기저를 잘 파악한 결과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미생>이 지닌 텍스트의 내적 리듬이다. <미생>에서는 미시서사의 일정한 마디마다 촌철살인의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하여 지나친 정보 제공으로 인하여 이완될 수 있는 서사의 긴장을 당기고 있다. 종합상사가 배경인 까닭에 무역 전문용어 등이 불가피하게 제공되어야하는 까닭에 자칫 서사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것을 미시서사의 전환이나 대사나 내레이션의 미적체험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하였다. 매주 2회 연재, 2-3일의 연재 간격을 유지해야하는 웹툰의 특성상 향유자의 관심을 유지하고 흥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단위의 미시서사 전개가 요구되지만, 그렇다고 매주 새로운 미시서사를 제공한다거나 미시서사 단위의 극적 긴장을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생>의 시도는 웹툰의 장르적 변별성과 대중의 취향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생>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미덕은 장그래의 성장담(Initiation story)에만 머물지 않고 원인터내셔널 전체 구성원을 캐릭터화하고, 그들 사이의 긴장과 미시서사의 유기적인 조합을 완성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들에게 고루 시선을 나눠주고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엄혹한 현실의 맨얼굴과 그 안에서 고분분투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비춰 보게 함으로써 공분(公憤)과 공감(共感)을 공유(共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웹툰 <미생>의 작품성과 정서적 공감을 공유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성공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halo effect)One Source Multi Use(이하 OSMU)의 전략적 전개 그리고 빼어난 텍스트적 성취에 기인한다.

우선 드라마 <미생>의 텍스트의 변별성은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미생>은 웹툰에 비해 업무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캐릭터들의 대응에 중점을 두어 다양한 캐릭터군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매주 2화로 구성하는 미시서사의 주제 단위가 선명하다는 점, 주제단위별 중심 캐릭터가 다양하게 등장시킨다는 점, 장그래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조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서 거시서사의 흐름을 유지한다는 점, 지금 이곳에서 예민한 소재들을 전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등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눈여겨 볼 지점은 장그래,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을 취업준비생인턴신입사원(정직원/계약직)’의 과정에서 구현하고, 그들이 대응할 세계를 긍/부정의 다양한 캐릭터 군상과 갈등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전개한다. 이러한 갈등 과정은 오과장, 김대리, 장그래의 영업3팀을 긍정적 공동체로 그리고 대비적으로 각 팀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의 미시적 갈등을 다시 구현하는 영리한 서사 구조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정규직/계약직의 문제, 성차별의 문제, 회사 내 정치의 문제, 일중독, 조직의 부속품일 뿐인 개인의 문제 등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서 향유자와의 심리적 접속을 유도하고, 공감과 공분을 확장하는 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두고 있다. 프로진입 실패, 고졸 학력, 낙하산을 중심으로 마이너적 캐릭터를 구현한 장그래, 회사 내 정치와는 무관하게 올바른 자세로 윤리적 우위성과 보편적 양심을 확보한 분명한 오과장, 빼어난 실력에도 성차별을 받는 안영이(마치 헤르미온느처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합리화하는 냉혈한 최전무 등의 캐릭터는 향유의 지향과 정서적 동조가 가능한 수렴점으로서 성공적으로 기능한다.

<미생>OSMU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OSMU는 장르전환(adaptation), 창구효과(window effects), 상품화, 브랜드 창출 효과 등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활동을 의미한다. OSMU의 동력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 여부, 원천콘텐츠의 전환 적합성, 거점콘텐츠의 최적화 여부, 연동 콘텐츠 간의 상호 프로모션, 다양한 창구로의 확산, 브랜드 가디언의 효과적인 통제에 의한 상품화, 지속적인 브랜드 창출 등에 있다. 그동안 콘텐츠 업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강력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방안, 전환의 최적화 장르 파악 및 전략 탐색, 상호 프로모션 방안, 상품화 전략 등에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콘텐츠의 제작 규모가 커지면서 콘텐츠의 리스크 헷지(risk hedge) 전략으로 이미 인지도를 확보한 원천콘텐츠를 중심으로 장르전환에 중심을 두면서 블록버스터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강력한 원천콘텐츠였던 웹툰 <미생>은 드라마 방영에 맞추어 프리퀄(prequel)에 해당하는 사석을 5화 연재함으로써 원천콘텐츠는 물론 거점콘텐츠인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켰다. 사석의 연재로 <미생>은 일종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을 매우 흥미로운 형태로 구현했다. <미생>은 원천콘텐츠에서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면서 원천콘텐츠의 프리퀄을 첨가하면서 원천콘텐츠의 전사에 해당하는 오과장의 신입사원시절을 추가하였다. <미생>의 프리퀄은 여타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과는 다르게 새로운 서사를 추가함으로써 보다 완성된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점콘텐츠의 방영에 맞춘 일종의 프로모션 툴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프로모션 툴은 뜻하지 않게 상품화의 결과로서도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미생>은 웹툰의 성공에 힘입어 드라마 이전에 이미 단행본 출간, 캔커피, 종이컵, 헛개수, 노트, 티셔츠 등의 상품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부가가치는 물론 <미생>이라는 브랜드 창출에 긍정적인 부메랑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미생>은 성공적인 PPL(Product Placement)을 통하여 미시콘텐츠(micro contents)를 활성화였다. 낯선 이물감 없이 전체 서사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숙취음료, 홍삼, 복사지, 일회용커피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PPL의 경우 상품당 1000만원이지만 <미생>의 경우에는 4000만원 수준이라는 것만 봐도 그 효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시콘텐츠의 활성화는 단지 수익의 극대화뿐만 아니라 향후 콘텐츠의 수명 연장 및 프랜차이즈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해야할 요소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생>을 통해 드러난 콘텐츠 향유 경로의 변화와 그에 다른 수익창구의 다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드라마 <미생>을 제 시간에 케이블을 통해서 보는 시청자만큼이나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통해서 즐기는 향유자가 증가한 것이 현실이다. 스마트환경 하에서의 콘텐츠 향유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만큼의 수익 창구를 갖게 되는데, <미생>의 경우에는 주문형비디오(VOD)와 푸티지(footage) 광고 매출이 두드러진다. 편당 제작비 3억의 시청률 6.7%대의 20부작 드라마의 VOD 매출 30억은 유의미한 수익이며, 더구나 일부 영상만 뽑아서 활용하는 푸티지 광고 역시 20억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콘텐츠의 수익 창구의 변화는 콘텐츠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향후 스마트환경 하에서 드라마는 구현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의 디바이스적 특성과 향유 경로와 연동하는 수익 창구의 성격에 따라서 스토리텔링 전략을 최적화해야하기 때문이다. PPL이 자연스러운 서사 요소의 확충, 미시콘텐츠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서사 전략, 푸티지 광고가 가능한 연출 전략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기획 단계부터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에 원천콘텐츠의 장르 전환까지 고려해야한다면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 창구의 다변화와 신규 개발은 드라마의 질적 성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그와 더불어 원천콘텐츠이 웹툰의 수익 창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탐구해야할 문제이다.

이청준의 자신의 스터디셀러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단언한 바 있지만, 그 작품은 현재가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청준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윤태호의 <미생>이 읽히는 시대는 온전히 완생에 이르지 못한 시대다. 아니 우리가 완생을 꿈꾸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미생>은 현재 진행형이며 완생을 향한 준열한 성찰의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곳에서 <미생>이 불러오는 공분(公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공감(共感)이며 공유(共有)의 힘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웹툰으로 단행본으로 드라마로 <미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만화규장각>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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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도깨비감투에는 1970년대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골목에 사는 혁이네 가족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몰장소적 풍경으로서의 다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김홍중에 따르면 풍경은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변동을 통하여 지각되고 감지되는 역사의 구성물이다. 그는 풍경을 주체의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인식틀이고, 체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제도로서 현실의 물질적 토대를 포함하며, 언어적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영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깨비감투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풍경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적인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곳’(現在)이 소환하는 풍경이다. 그것은 실체적 공간으로서의 1970년대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재구하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대표성을 갖게 되는 시공간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는 사라진 소중한 무엇인가가 찾아가는 대타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감투의 풍경 속에서는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가 있고, 좁았지만 자유로웠던 골목이 있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밥상이 있고, 꾸중하는 어른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은 일에 모두 수긍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명랑만화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컨벤션이다. 박인하와 김낙호는 1970년대를 명랑만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은 웃기는 만화라기보다는 일상을 그린 만화로 규정하며, 그 핵심은 친근함과 일상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명랑만화 안에서 친근함과 일상을 구성하는 컨벤션에는 당대가 지향했던 양친부모가 모두 있는 중산층 가정,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단독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골목길이라는 물적 토대는 물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기준과 합의 가능한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당위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교화적, 도덕적, 당위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명랑보다는 바른만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도깨비감투가 명랑만화보다는 바른만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만화의 성격을 내재화한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 발표 당시 지향했던 보편적 일상의 반영이거나 검열과 심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타협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핵가족화, 이웃 간의 관계 단절, 가치관의 아노미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던 개발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이 심의라는 이름으로 혹독하게 자행되는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도깨비감투를 비롯한 당대의 명랑만화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받는 일상이거나 과장된 낙관 속에 은폐된 일상에 가깝다.

도깨비감투만약 내게 〇〇〇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판타지를 한국적인 소재인 감투로 바꾸어 하이콘셉트(high concept)로 전면화한 작품이다. 도깨비감투는 투명인간의 변형으로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와도 다르지 않고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소박했지만 보편적이었던 판타지의 구현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도깨비감투라는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도구를 획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상담과 모험담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법의 도구를 얻게 되기까지의 모험담과 마법의 도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모험 및 성장담 그리고 그 능력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귀환담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깨비감투는 이러한 상례에서 벗어나 도깨비감투를 얻고 난 이후에 일상 속의 소소한 소동 혹은 다소 낙관적이거나 맥락 없는 모험을 그려냈다. 제사, 방학, 도둑, 위문공연, 눈싸움, 목욕탕, 성적표, 불우이웃돕기, 설날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납치범 검거, 밀수범 검거, 탈옥수 자수, 북한, 땅굴 등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월간이라는 특성과 초등학생이 중심 독자였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이 1년 단위로 가정과 학교의 루틴을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소 이물(異物)스럽거나 맥락 없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특히 우연하게 북한에 도착하고 그곳의 실상을 바라보고 땅굴을 발견하는 등의 에피소드(별책부록14/ 복간본 페이지가 픽스되면 복간본 기준으로 권수 표기 하겠습니다.)는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 식의 반공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에서까지 왜 굳이 북한을, 그것도 아주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야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압력에 의한 작가의 창작권 침해나 작품의 완성도 저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감투의 중심 서사는 중심캐릭터인 혁이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들을 도깨비감투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물은 대부분의 뚜렷한 적대자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들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향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도깨비감투에서는 뚜렷한 적대자나 본격적인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명랑만화의 성격상 본격적인 갈등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의 재미에 그 중심을 두고 매월 단위의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요소와의 해소과정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결론(미덕)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의 일방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모험담의 동력이 되어야할 성장이나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월간 잡지라는 압도적인 매체를 통해, 월간이라는 분명한 주기를 가지고, 초등학생이라는 뚜렷한 타깃에 맞추어, 연재물이지만 단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일상 속의 재미를 지향했던 명랑만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본다면, 도깨비감투의 이와 같은 서사적 특성은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지 명랑만화가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꺼벙이, 탱구, 두심이, 요철이, 고집세 등)를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의 웃음을 전면화하였지만, 이 작품은 개성적인 캐릭터(혁이)보다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도구(도깨비감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할 수 있다.

사실 엄혹했던 시대적 배경과 열악했던 산업적 환경 그리고 제한적이었던 소비 및 향유의 토대를 고려할 때, 1970년대 한국 만화산업에서 명랑만화는 최적화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랑만화는 당국의 심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분명한 독자층과의 원활한 소통에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단순하지만 분명한 컨벤션의 설정, 단편서사 중심의 스피디한 전개, 심각한 고민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략한 선중심의 약화체(略畫體)와 재미있는 희화체(戲畫體)를 활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중심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밖에 없고, 상이한 가치 간의 긴장과 대립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갈등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명랑만화의 수다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긴장, 갈등, 변화가 내재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 회귀할 뿐인 체제 순응적이며 기존 질서를 강화할 뿐인 장르라는 혐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와 본격적인 갈등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도깨비감투에서 사회악(社會惡)이나 체제악(體制惡)을 도깨비감투로 제거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랑만화로서의 장르적 특성과 주 독자층이 초등학생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 것인가는 좀 더 숙고해볼 문제다.

도깨비감투의 가장 지배적인 설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하거나 잉여로 취급받았던 어린이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타개해나간다는 판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십대의 어린 주인공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어른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무력한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어린이들의 욕구 등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깨비감투의 이러한 설정은 독자와의 공감을 높이고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일에만 효과가 있는 능력이라는 단서와 언제든지 분실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모두가 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설정은 일종의 데드라인(Dead Line) 설정과 같은 서사 장치로서 극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도깨비감투라는 중심 소재 외에는 매화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서사적 완성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분석하여 그 안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해야할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서사적 완성도보다는 시트콤처럼 일상 속의 재미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명랑만화의 계보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작품만의 변별성을 추론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깨비감투만의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에서 분명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다소 모호해진 명랑만화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면과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깨동무가 주는 신뢰와 재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에 연재되는 작품의 대중적인 지지와 영향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도깨비감투를 제대로 읽기위해서는 어깨동무의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재적 시점에서어깨동무를 발행했던 육영재단의 성격과 실체, 발행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 우리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작품들을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로운 시점에 단행본 형식으로 읽어보는 것도 도깨비감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 역시 도깨비감투를 무척 즐겁게 읽으며 자란 세대(심지어 그 시절 도깨비감투를 소재로 동화-지금으로는 팬픽까지 써봤음을 실토한다)로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했다.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커버린 초등학생 하나의 소환, 잘 사는 사람보다는 잘 살고 싶어 애쓰던 서울 변두리 풍경의 소환, 친구들에게 빌려 읽던 도깨비감투갱지 냄새의 소환……이 작품을 매개로 타임 슬립(Time Slip)하는 순간 모든 현재가 미끄러지고 오롯이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의 기억 어딘가에 도깨비감투와 함께 나를 묻어 두고 있었나보다.

신문수 만화는 도깨비감투가 그러하듯 추억 속의 만화가 아니다. 도깨비감투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깨비감투에는 신문수 특유의 따듯하고 여유 있는 감성이 오롯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세계 안에서 도깨비감투를 읽던 시절처럼 위로받고 의지하고 꿈꾸고 싶다. 처음 만났던 도깨비감투에서처럼.

2016년 도깨비감투》복간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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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의 허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월이 시작되고 독감이 지독한 목통증까지 데리고 왔다. 며칠 잘 먹고 쉬면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한 주가 지나고 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문제는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전혀 식욕이 없으니 기운을 차릴 도리가 없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엉덩이쪽이 부어서 병원에 가보니 엉덩이에 염증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얼결에 수술을 받고 다시 연구실에 나갈 때까지 또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중에서

앓다가 수술 받고 통원치료 하느라 집에 있다 보니 그날이 그날 같았다. 더구나 엉덩이 수술로 앉지를 못하고 주로 침대에 누워 있자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침대에 깔아둔 전기장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오한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보일러 온도만으로는 부족해 전기장판에 불을 넣으면 금방 따듯해졌다. 금방 따듯해지는 만큼 또 금방 뜨거워져서 꺼야하니 번거로웠다. 그러다보니 뜨듯한 열기로 온몸을 지지거나, 은근한 온기를 지속해주었던 어린 시절 아랫목이 그리웠다. 그 시절 아랫목에는 늦게 귀가하는 식구의 밥이 주발에 담겨 항상 담요로 덮여 있었다. 밥도 못 먹고 다니냐는 싫지 않은 핀잔과 함께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주발 뚝딱할 수 있었던 것은 식구들의 따듯한 기다림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든든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쌀 두 가마니와 연탄 천 장 그리고 김장 한 접을 하고는 안도하곤 하셨다. 없는 살림에 여덟 식구(게다가 우리 오남매의 먹성은 또 얼마나 좋았던가)의 겨울을 늘 걱정하셨는데,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을 장만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기면서 식구들이 배곯지 않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그 시절 어머니의 겨울맞이가 자주 생각나는 것도, 아랫목 한 주발의 밥이 자꾸 그리운 것도 사는 일의 고단함과 허기 때문은 아닐까.

몸이 불편한 상태로 누워서 TV채널을 돌리다보니 온통 먹방이다. 최고만을 먹는다는 미식회에서부터 전국의 유명 맛집의 순위를 정하고 신화화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죽은 상권을 살리겠다며 유명 외식업체 사장의 맛 컨설팅 프로그램까지, 심지어 과식과 폭식까지 화제가 되어 얼마나 먹느냐를 즐기는 프로그램까지 먹방은 차고 넘쳤다. 누가 봐도 지나치게 많이 먹는, 먹는 행위 그 자체가 화제가 되는 1인 방송의 진행자들은 시청자들의 자발적 성원으로 억대 연봉 이상의 수입을 거둔다니 놀랍고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살면서 즐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결핍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다이어트 때문에 자신은 못 먹지만 누군가가 대신해서 먹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학을 넘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방송을 하면서 마른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으로 보낸다는 유명 BJ의 방송에서 지독한 허기를 느끼는 것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었을까?

이가라시 다이스케(五十嵐大介)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가 최근 한국에서도 영화화되며 화제다. 이 작품은 음식 그 자체보다는 자연에서 재료를 얻는 과정,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그 안에서 삶을 이야기한다. 음식만화임에도 완성된 음식의 매혹이나 맛에 대한 찬미보다는 재료와 조리 과정에 최대한 많은 시간과 언어를 배려함으로써 충분히 생각하고 즐길 시간을 준다. 이 작품을 읽으며 먹방으로 드러난 폭식과 폭식으로 은폐된 우리의 허기를 생각한다. 우리가 따듯한 포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랫목 한 주발의 밥으로 기다려줄 따듯함, 그것이 있다는 든든함을 잃고 있어서는 아닐까? 이제 봄이라는데 아직 날은 차다. 오늘밤은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콩비지에 넉넉하게 밥 한 주발 말아 이제 끝물일 총각김치를 얹어 한 사발 깨끗하게 비워내고 싶다

월간 에세이》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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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나의 이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올해 초 우리는 낯선 팬덤을 만나야 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느닷없이 등장한 혼모노(本物) 현상이 그것이다. 이 말은 극장에서 <너의 이름은>이 상영되는 도중에 OST를 크게 따라 부르거나, 객석에서 일어나서 호응을 유도하며 소란을 떤다거나, 감독 인터뷰 현장에서 자신에게 질문할 기회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통역의 진행을 무시하고 일본어로 직접 질문을 하는 등 개념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나 콘텐츠와의 상호작용이 원활해진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다양한 팬덤의 등장은 콘텐츠 생태계의 관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 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화된 팬덤의 역동성은 스타는 물론 관련 콘텐츠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향유문화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혼모노 현상은 여전히 낯설고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단지 오타쿠의 일탈적인 행동 혹은 기이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천착해 보면 그 기저에서 지금 이곳의 가오나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등장했던 가오나시는 얼굴이 없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없고 누군가를 삼켜야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혼모노의 기저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혼모노의 심리 기저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에 대한 친연성과 전문성을 드러냄으로써 타자와 구별짓기를 시도하고, 구별짓기를 통해 충성도나 특별한 유대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놓여있다.

참여적 수행을 통한 가치 창출의 즐거운 체험을 향유라고 할 때, 그것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그것과 대등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자신을 매혹했던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비참한 인정투쟁이거나 기만적인 위로가 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역시 누군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소중한 사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누구지, 누구야너의 이름은!”누군지도 모르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의 데뷔작 이후 반복적으로 탐색해온 모티브다. 이러한 탐색의 모티브를 반복한다는 것은 탐색의 대상이 실체적이라기보다는 메타포에 가깝다는 의미다.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에서 치요코가 평생 찾아가는 대상이 열쇠의 남자가 아니라 그를 만날 때의 자신이었던 것처럼. 따라서 <너의 이름은>에서 찾고 있는 것은 너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 이름이 호명할 너이고, 너를 호명하고 있을 나 자신이기도 하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모호한 화법으로 찾는 대상을 딱 꼬집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름과 관계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름을 잃어 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상기해보면, 이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차적 기호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끊임없이 서로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기억하려 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려는 시도와 같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으려는 내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온전히 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굳이 남녀가 몸이 바뀐다는 식상한 도리카에바(とりかへばや) 모티브를 활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찾아가야할 이름은커녕 자신의 이름까지 잃고도 그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요즈음 뉴스에 자주 나온다. 그들의 하는 변명이나 부인을 들으며 불쾌한 혼모노의 극장을 떠올린 것은 필자만은 아니리라. 이제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2017.04.2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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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옳았고 그래서 상처 받았던 그해 여름

- 마르코 타마키 글, 질리안 타마키 그림, 그해 여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누구나 가지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돌아보면 그 개개의 누군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절절했던 시절이 있다. 그해 여름은 그 절절함을 열다섯 소녀 로즈의 시점으로 따라가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찾아가는 이와고 비치 오두막에서 여름휴가를 보내왔건만 유독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즈의 엄마와 아빠가 둘째 문제로 해묵은 갈등을 드러내고, 이와고의 유일한 상점 브르스터를 중심으로 마을 젊은이들의 미숙하고 어설픈 하지만 절박했던 사건을 로즈의 시점에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해 여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어린 소녀의 눈에 낯선 어른의 세계를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그해 여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읽어야할 것은 갑자기 나타난 사건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로즈의 시선이다.

내년 여름에는 틀림없이 멋진 가슴이 생길 것이라는 로즈의 마지막 대사는 성장한 시선의 다른 표현이다. 성장은 불안과 맞서는 일이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즐겁게 지내던 로즈에게 문득 다가오는 세상의 다른 얼굴, 비로소 보게 되는 갈등과 고통스러운 순간들. 넘어져봐야 걷는 법을 배운다는 마을 노인의 충고처럼 로즈의 그해 여름은 불안이고 성장이다. 부쩍 성장한 몸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지고, 달라진 눈높이는 시선이 머무는 곳곳을 낯설게 한다. 낯선 세계는 불안하고, 불안한 만큼 고민하고 부딪혀야할 시간은 고통스럽다. 로즈와 윈디가 습관적으로 빌려오는 공포영화DVD를 바라보는 두 소녀의 시선(pp63-64)은 불안과 성장 사이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본문 중, 공포영화 DVD를 보는 로즈와 윈디(pp. 63-64.)

텍스트 전체에 걸쳐 이런 메타포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밤길과 손전등이 비추는 곳만 정체를 드러내는 세계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탐험하듯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88-91), 호수 속에서 눈을 뜬 채로 떠있는 로즈, 사유지를 탐험하듯 들어가고 그곳에서 마을 젊은이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던크의 아기를 가졌지만 그의 무관심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는 제니와 둘째 문제로 아빠와 불화를 겪던 엄마가 물에 빠져 죽으려는 제니를 구하면서 둘 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마치 세례를 받듯,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태어나듯 의사(疑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마치 축제의 과정과 같다. 일상의 타락으로 신성함을 잃게 되면 의사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로즈에게 그해 여름은 기억할만한 성장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본문 중, 밤길을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 88-91.)

그해 여름이 미덕은 당위로서의 성장, 성장을 위한 작위적 갈등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소위 메인 플롯을 추동하는 중심 갈등의 비중이 높지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중심 갈등의 해소과정을 쫓아간다기보다는 그해 여름 휴가동안에 로즈의 시점에서 바라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현명한 독자는 갈등의 해소과정이 아니라 그 갈등에 반응하는 로즈의 변화과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시기, 삶의 봄날에서 여름을 맞는 시기에 휴가라는 탈일상의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스스로의 시선을 맞추어가는 로즈의 변화가 이 작품의 중심이다. 윈디가 파놓은 모래구덩이에 로즈가 들어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가슴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성장의 징후이며, 로즈가 모아둔 조약돌을 침대에 두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그러한 징후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즈의 성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작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성장이 그녀의 성장만이 아니고, ‘그해 여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느 한 때의 그것이듯, 그 무렵 우리가 겪었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그해 여름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해 여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떤 여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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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

-체스터 브라운, 유료 서비스, 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는 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에 있다. 매춘이라는 다소 자극적이고 불편한 소재를 사적인 경험담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이다. 사실 이 작품이 도발적인 것은 소재나 진술의 형식보다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다. 선택과 동의만 바탕이 된다면 형태의 섹스든 용납될 수 있기에 매춘은 데이트의 일종일 뿐이고,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던 그것은 내 권리며, 성매매 남성은 여성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사는 것이 아니며, 권력, 착취, 선택, 결혼 등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춘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거침없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도 좀처럼 쉽게 동의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작가 자신도 그러한 도발의 설득력에 의문을 품은 것인지 아니면 견고한 보편의 벽을 의식했는지 몰라도 235쪽의 만화 뒤에 다시 2쪽의 발문과 62쪽의 부록을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도발은 문제제기로서 혹은 생산적인 토론을 유도하는 첫 단추로서 의의를 지닌다.

체스터 브라운유료 서비스미메시스 표지

작가는 작품 내내 이 소재의 자극성을 중화시키고 메시지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약화체 그림으로 매우 차분하고 기계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다. 도발적인 메시지와 문제 제기가 자극적인 이미지에 그 중심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지를 기록하듯 사실 중심의 서술과 토론 중심의 전개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매춘여성들의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났던 여성들을 그대로 캐릭터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느슨하지만 자연스럽다. 덕분에 독자는 작가가 은밀하게 기획해놓은 담론의 장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된 매춘의 장 앞에 놓임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매춘 하는 여성들의 내력담을 신파조로 서술하여 과도한 감상성을 유발하거나, 매춘 현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즐기면서도 사회 부조리나 구조적 모순 따위를 운운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은밀한 비겁이 아니라 이 작품은 그대로의 매춘과 맨얼굴로 대면할 것을 권유한다. 그 안에서 섹스, 결혼, 매춘 등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메시지의 공감도, 도덕적 정당성, 서사적 완결성, 치밀하고 압도적인 플롯, 철저하게 계산된 캐릭터, 시공간의 매혹적인 메타포 등등 만화의 완성도와 상관될 수 있는 일체의 요소를 내려놓고 체스터 브라운은 격렬하게 토론할 수 있는 도발적인 문제의 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문제 제기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지금 이곳에서 굳이 비난의 가능성이 충분한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를 텍스트로 삼은 것은 토론의 과정, 그 과정의 소란스러움, 소란스러움의 역동성, 역동성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논리성과 개방성 그리고 생산성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토론이 차단된 지금 이곳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일방적인 편 가르기, 비난, 혐오, 분노의 비겁한 전개를 향한 도발로서도 이 작품은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품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정당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 인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과 인식,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매춘의 다양한 층위를 고려해야지만 그 사회 안에서 매춘의 정체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매춘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모순과 폭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 작품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자유의 장이 지니고 있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그것의 가능성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성공적인 텍스트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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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길에서 길을 묻다

 

.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마음 준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첫 번째 여행: 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두 번째 여행: 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세 번째 여행: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떠날 준비: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 길이 데려다 준 길

01일 여행 중 떠나는 여행

02일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03일 알 수 없는 나라

04일 걷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이유

05일 세 개 주를 달리다

06일 오클라호마에서 울다

07일 서부 개척은 없다

08일 행복한 미술관 혹은 버드와이저

09일 밥은 힘이 세다

10일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11일 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12일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

13일 너에게서 나를 보다

14일 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15일 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16일 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17일 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18일 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19Freedom is not Free

20일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21일 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 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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